[칼럼] 나의 아버지 X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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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관(시카고 노인건강센터 사무장)

 

경북 의성군 안계면에서 정미업을 하시던 목사님의 형님(하대성)댁에서 4개월 동안의 피란생활을 끝내고 걸어서 문시랭이로 돌아오셨다. 원래 작은 마을이지만 인민군과 내무서 빨갱이들의 포악한 짓으로 아까운 사람들이 산채로 죽임을 당한 곳이다. 가장이요, 남편이요, 논밭 갈아 먹고사는 농민이요 아이들의 아버지인 선한 사람들이 여럿 희생당한일로 인해 동래가 슬픔에 잠겼다. 그것도 그럴 것이 30가구정도인 작은 마을 주민들은 혈연이상으로 연결된 선하고 착한 공동체였기에 잃음에 대한 아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고 또한 오래갔다.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새로운 힘을 불어 넣어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뿐이었다. 주민 거의가 유교문화에 젖은 사람들이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줄 종교적 상징을 찾아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거나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는 것으로 自慰했지만 이런 것들은 앰풀주사 정도의 임기응변이지 위로가 되지 못했고 또한 오래가지도 않았다.

이른 봄이라 농촌에서 할 일도 많은데 전혀 움직이지 않으니 걱정도 태산이었다. 하 목사님은 예전과 같이 새벽 5시에 교회 종을 울렸다. 이런 수난이 있기 전에도 울렸던 종소리지만 지금 올리는 종소리는 위로의 종소리다. 예전에는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였다면 지금의 종소리는 슬픔과 아픔을 달래주는 위로의 종소리다. 동래 사람들은 종소리와 함께 일어나 일을 시작했다. 좋던, 싫던 종소리에 그냥 일어났다. 쇠죽도 끓이고 들로도 나갔다. 종소리가 무엇인대 사람들을 깨우고 움직이게 하는지!

5분 동안의 종소리가 끝나면 목사님은 예배당에 들어가신다. 정해놓은 시간은 없지만 기도 내용에 따라 길고 짧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려움과 고난, 핍박에 처할 때는 철야기도를 하신다. 금식기도도 하신다. 교회가 병들어 신음할 경우에는 오핸 금식기도에 들어가신다. 로당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에는 눈물이 없지만 하 목사님의 기도에는 눈물이 많다. 아침을 드신 후 밭으로 나가셨다. 남편을 잃은 사람의 농사를 돕기 위해서다. 봄보리 파종으로부터 야채밭 가꾸는 일 등 열심히 도왔다. 수시로 재관이와 재은이를 불러 일을 시켰다. 저녁엔 동리 사랑방에 가서 동민들과 새끼 꼬는 일을 자진하셨다. 하 목사님은 9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열두 살 때 어머니마저 잃어 증조부 밑에서 농사를 배워 농사일을 잘하셨다. 이 경험이 동리사람들과의 일체감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새끼를 꼬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구가 되었고, 후에는 개인적인 얘기까지 나눴다.

목사 사택 두 칸짜리 방을 야학교실로 썼다. 산술, 국어, 음악, 역사, 성경 그리고 남은 시간은 여흥시간이었다. 한 달도 안 되어 장소가 좁았다. 왜냐하면, 이 야학소식을 듣고 20리나 되는 백암리 그리고 다른 마을에서 모여 들었기 때문이다. 유교 집에서는 아이를 예수쟁이들이 하는 야학엔 보낼 수 없다고 했지만 자식들은 부모 몰래 다녔다. 문촌에는 ‘배우자! 아는 것이 힘이다!’ 하는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예배당 종소리, 야학을 밝히는 호롱불빛, 이 둘은 작은 농촌에 밝은 새벽을 알리는 빛이 되었다.

농번기가 시작되었다. 모두 들로 논으로 산으로 나갔다. 아이들도 주경야독을 하느라 피곤을 견디며 배웠다. 그 때 야학에 나오던 아이들이 서울의 중학교 간호학교 등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해서 금강양행(구두 회사) 회계, 간호사, 교회 전도사 등 여러 분야에서 일하게 되었다. 종소리에 깨고, 호롱불 밑에서 공부하던 그 때의 소년소녀들이 지금 나이 80이 넘었고 암으로 고인이 된 소년도 있지만, 그 때의 종소리와 호롱불은 잊을 레야 잊을 수 없고 지울 레야 지울 수 없는 추억으로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