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의 아버지 X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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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관(시카고노인건강센터 사무장)

 

김용기 장로님(농군학교 이사장)과 Bob John’s University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강태국 목사님은 원삼면(용인군)에 학교를 세울 계획으로 面 일대를 답사하던 중 ‘녹득’이라는 밤나무 동산 소유주를 만나 젊은 아이들을 위한 비영리학교를 설립하겠다는 꿈과 취지를 말씀하자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이웃에 돌려주고 가랴했는데 마침 잘 오셨소! 당신이 필요한 만큼 땅을 내 놓을 테니 잘해 보십시오!” 쾌히 허락했다.  벽촌 ‘녹득’이라는 곳에 ‘복음중학교(가명)’가 탄생하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빈농의 어린 꿈나무들이 그토록 원하는 학교가 세워진다는 소식에 용인군 전체가 흥분했다. 입학원서를 접수하고 면접날이 되자 80여명의 소년들이 모였다. 30리 밖에서도 왔다. 가난해도 자식들 공부는 시켜야 된다는 부모들의 마음은 태산 같으나 가난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하던 때라 하 목사님 좋은 일 하신다며 대 환영이었다. “사람은 나면 배워야한다!”는 신념으로 꽉 찬 산골부모님들은 ‘배우지 못한 것이 恨’이란 말, ‘배우지 못한 것이 罪’란 말을 잊지 못하고 살아온 세대라 배움에 대한 소망과 열정은 어느 나라 국민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김용기 장로님의 교육이념은 ‘일하며 배우고, 배우며 일하자’로서 가난한 덴마크를 부유한 낙농국가로 만든 그 기적을 우리도 만들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도록 격려하시고 또 격려하셨다.

신앙생활을 위해서 하 목사님이 책임을 지도록 부탁을 받아 하 목사님은 예전과 같이 혼신을 다해  온종일 다니시며 전도에 전념하셨다. 다행히, 중학교때부터 영어성경반에 다니던 재관(필자)이가 미국선교사 설의돈(Sheldon)을 녹득 마을에 초대하여 많은 관계자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 예배당의 건립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했고 설의돈 선교사도 적극추진하기로 약속을 했다. 얼마 후 설의돈 선교사가 직접 평택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병영을 방문하여 이 의견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많은 건축자재가 빨리 배달되었다. 반반한 나무쪽 하나도 얻기 힘든 때 재목과 시멘트, 뺑끼, 못, 톱, 합판, 각목 등등 많은 물자가 큰 트럭으로 계속 공급되었다. 이렇게 움직이는 발전모습은 하나의 기적과 같았다.  교회를 짓고 ‘심포교회’라 불렀다.

1956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을 기해 에덴鄕에 ‘심포교회 헌당식’이 있었다. 조선역사이래 처음 보는 大 慶事가 여기서 벌어진 날이다. 당시는 면장이 마련하는 잔치도 대단한 때인데 하물며 대한민국 부통령 함태영 목사님이 오신다는 얘기가 전국에 퍼지니 시골엔 새로운 역사가 숨 쉬는 날이었다. 3星將軍, 경기도지사, 경기도경찰국장, 용인군수, 예수교장로교회 노회장 등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大慶事로서 조선역사이래 처음 보는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언덕에 앉아 기다렸다. 지프차가 들어오고 함 부통령의 까만 세단이 들어올 때는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 눈물을 흘리는 사람, 손수건을 흔드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등 순수한 감정표현이 아름다울 뿐이었다. 함태영 목사님께서는

“하 목사는 고지식한 목사십니다. 옛날부터 잘 알고 지냅니다만 일평생 ‘양떼와 목자’만 생각하고 一心月球 외길을 걸어온 분입니다. 제가 잘 압니다. 생활이 어렵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분이십니다. 오늘 이 작은 마을에 복음의 등불이 켜졌습니다. 모두 기뻐하세요! 저는 오늘 참으로 기쁩니다. 하 목사님 이리 나오세요.” 하시며 ‘복음의 열쇠’를 하 목사님에게 수여하셨다. 하 목사님은 큰 절을 올리시며 “제가 늘 존경하던 함 목사님을 여기서 뵈오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노구를 이끄시고 이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는데도 불구하시고 끝까지 지켜봐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부탁하신대로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목사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 목사님은 눈물어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