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무관심이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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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목사 (선한 이웃 교회 담임/ 미 육군 군목)

74차 유엔총회가 지난 주에 뉴욕에서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이번 유엔총회에서 최고의 관심을 받은 인물은 각국의 정상들도, 세계적인 지도자들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16세의 어린 스웨덴 소녀, 그레타 썬버그 (Greta Thunberg)라는 청소년 환경운동가 였습니다. 세계의 지도자들이 모두 모인 유엔총회장에서 그녀는 지구의 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단지 희망만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행동해야할 때라며, 빈 말뿐인 어른들을 향해 호통치듯 이렇게 연설하였습니다: “지금 이시간에도 사람들은 고통하며, 죽어 가고 있습니다. 모든 생태계는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이제 지구의 거대한 멸종의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당신들은 한낱 돈과 경제성장과 같은 동화같은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습니다.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습니까!” (How dare you!) 이 소녀는 Asperger’s syndrome이라는 자폐증 진단을 받았지만, 자신의 장애를 아랑곳하지 않고 학교를 벗어나 스웨덴의 국회앞에서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한 시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녀의 이같은 국회앞 시위는 전국의 학생들이 참여하는 환경운동으로 발전하였고, 결국 유엔에까지 초청되어 세계의 지도자들앞에서 지구 온난화의 긴급한 위기에 눈감고 있는 “무관심”에서 깨어나 이젠 “행동”하라고 촉구하게 된 것입니다.

“감히 어떻게 이럴수 있습니까!”라며 지구 환경에 무관심한 어른들을 질타하는 어린 소녀의 연설을 들으며, 지구의 환경뿐만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웃들의 삶에 비정하리만치 “무관심”한 우리 어른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굶주림과 고통속에 사는 이웃들이 그렇게 많은데 “감히 어떻게 마치 아무일도 없는냥 살 수 있습니까!”  마치 그녀의 음성이 이렇게 들리는 듯 했습니다. 무관심의 두터운 장벽을 쌓아가며 살아가는 스스로의 모습이 갑자기 부끄러워 졌습니다. 성경엔 이웃의 가난과 아픔에 무관심하였던 한 부자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16:19-31)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부자는 아주 대단한 부를 소유한 사람였습니다. 값비싼 옷을 걸치고, 사치스럽게 매일 매일을 살아가며 인생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그 집 대문밖에는 헐벗고 상처난 거지가 혹시나 부자집 상에서 버려진 음식이라도 주워먹을 수 있을까하여 자리를 펴고 생활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끝내 이 거지는 부잣집 대문밖에서 굶어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는 죽어 아브람함의 품에안겨 평안을 누리게 되었고, 부자는 지옥불에 떨어지 끔찍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고 예수님은 소개합니다. 이 비유의 교훈은 부자는 모두 지옥으로, 가난한 자는 모두 천국에 이르게 된다는 가난한 자에대한 예찬이 아닙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무자비하고 무관심한  “종교인의 위선”에 대한 고발였습니다. 자신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여기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지만, 고난받고 상처받는 이웃에 대해서는 비정하리만큼 “무관심”한 그들의 위선적인 믿음을 고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할 믿음의 참 모습은 “사랑과 자비”를 품은 삶입니다. 야고보서에는 진정한 종교(Pure Religion)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1:27)라고 말씀합니다.  “고아와 과부”란 공동체가 보호해야할 사회의 소외계층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진실된 신앙인 이라면 결코 이웃과 동족의 고통에 “무관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지난 8월엔 풍요의 도시 서울의 한 복판에어 탈북민인 어머니와 6살된 그녀의 아들이 굶어 죽은 채 뼈만 앙상히 남은 시체로 발견되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웃조차 모른채 두달만에서야 이 모자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2009년 굶주림을 피해 목숨을 걸고 탈북하여 한국땅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러나 끊없는 생활고에 시달리며 고통을 당했다고 합니다. 아사하여 죽기전 이들 집안에 남겨진 음식이라고는 오직 냉장고안에 고춧가루 한봉지 뿐이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음지에 가려진 탈북민들의 고통스런 현실은 한국사회의 평균 자살률보다 무려 3배이르고 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동족의 아픔과 고난에 눈과 귀를 가리고 “무관심”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에 이젠 경종을 울려할 때요, 행동해야할 때라 여겨집니다. 이웃의 고통을 보면서도 “어떻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살 수 있나요!”(How dare you!)라고 호소하던 스웨덴 소녀, 그레타의 외침이 귓전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 합니다. 지금은 희망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 “행동”해야 할 때라는 긴급한 멧세지를 듣게 됩니다.(servant.sa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