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미국 크리스마스의 역사(1)

1926

손태환 목사(시카고기쁨의교회 담임) 

곧 성탄절이다. 역사 속에서 크리스마스는 성스러운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 사이에서 오랜 싸움을 해 왔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교회는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 애썼고, 거리와 백화점에서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예수와 별 상관없는 그들만의 축제를 즐겨왔다. 이 싸움의 역사를 미국의 식민지 시절 뉴잉글랜드에서부터 찾아보려 한다.

현대적 크리스마스의 역사는 그리 깊지 않다. 17세기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크리스마스 절기를 즐기는 것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범법자에게는 5실링의 벌금을 물렸다. 이교도의 문화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좀 더 재밌는 속사정이 있다. 당시 이 시즌이 되면 사회적으로 하층 계급에 속한 이들이 술을 먹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니거나 구걸을 하고 폭식이나 폭음을 하는 일이 많았다. 청교도들이나 상류계층 사람들은 이런 모습이 꼴 보기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당시에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가난한 사람들이나 소작농들이 부자들을 찾아가 선물(음식이나 술 또는 돈)을 요구하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할로윈의 Trick-or-Treat와 비슷한 풍경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선물에 대한 답례로 그들은 술 취한 상태에서 노래를 불러주었다. 상류층과 하류층의 위치가 일시적으로 뒤집어지는 “사회적 역할의 역전 혹은 자리바꿈 현상(role inversion)”이 당시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일어났던 것이다.

뉴잉글랜드의 상류층 사람들과 부자들은 이런 크리스마스 절기가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사회적 하층민들의 ‘무질서’한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고, 특히 ‘사회적 역할의 역전 현상’은 하층 계급들을 ‘통제’하는 데 있어 부담으로 작용했다. 한 청교도는 이런 말을 했다. “이 가난하고 단순한 피조물들은 미신적이고 성스럽지 못한 이 절기가 끝나면 미쳐 날뛴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크리스마스 절기를 없앨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벌금을 매기며 통제를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크리스마스를 둘러싼 이 싸움은 18세기 중반 회중교회의 새로운 지도자들에 의해서 새로운 단계에 들어간다. 이들이 볼 때 크리스마스 축제 자체를 없애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크리마스를 아예 경건하고 절제된 종교 형태로 만드는 것은 어떨까?”

어차피 없애지 못할 바에야 새로운 형태의 크리스마스를 만들어 문제를 해결해 보자고 생각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18세기 중후반의 유니버설리스트나 예수의 신성을 믿지 않는 유니테리언들까지 동조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신학적 근거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크리스마스를 세속적 영역으로부터 성스러운 영역으로 ‘구원’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들은 크리스마스에 교회 문을 열면 사람들은 교회로 올 것이고 상인들은 문을 닫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사회적으로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일들도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뉴잉글랜드 청교도 공동체의 세속화는 이미 17세기 중반부터 일어났으므로), 결과는 예상과 정반대였다. 19세기에 이르렀을 때, 대부분의 교회는 크리스마스에 문을 닫았고 상점들은 여전히 대목을 누렸으며 거리에는 여전히 술 취한 이들이 돌아다녔다.

교회가 세속적 문화에 대해서 적대적이거나 통제의 대상으로만 여길 때,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크리스마스를 교회 중심적 홀리데이로 만들려는 그들의 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그것이 끝이었을까? 아니다. 19세기 중반 뉴요커들이 이 ‘크리스마스 배틀’에 뛰어들면서 새로운 국면이 펼쳐진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