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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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권 목사/크로스포인트교회 담임

우리 속담의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부뚜막에 있는 소금도 넣지 아니하면 음식이 짠맛을 낼 수 없다는 뜻으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과 비슷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것이라도 다듬고 정리하여 쓸모 있게 사용해야 값어치가 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국립어원은 정리하고 있습니다. 부뚜막의 소금이건, 서 말 구술이건 행동과 실천이 가치를 나타냅니다. 이는 사랑도 마찬가지 입니다.  훌륭한 선생님들이 가르쳐 주시는 사랑에 대한 정의와 구분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아가페, 에로스, 필리아, 스트로게 등으로 분류하고 각각 그들의 관계를 알려주는 설교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친절하게도 원어적인 의미까지 곁들여 알기 쉽게 설명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지 않으면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리 소금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통달한다 해도 음식에 집어넣어 짠 맛을 내야 가치가 있습니다. 꿰지 않은 구슬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들은 ‘삶이라는 정의’에 대하여 제각기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대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 주기를 원하고 그런 방향으로 자신을 대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요구하는 그는 누구입니까? 사랑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고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사랑을 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지킬 수 없는 까다로운 조건이 걸려있는 사랑도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일생은 순간순간 결정의 결과물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의 결정들로 구성 된다는 것은 참으로 반갑고 좋은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삶을 바꾸고 되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수를 즐거워하는 사람도 없고 실수를 위해서 에너지, 시간, 돈을 쓰는 사람은 더 더욱 없습니다.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가장 큰 실수중의 하나는 실수를 통해서 뭔가를 항상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갖고 있습니다.  실수를 통해서 자동적으로 배워지지는 않습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깊이 생각하고 대책을 세워야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을 가지시던 날, 발 씻기는 것도 잊고 서로 누가 더 큰가 다투던 때, 몸소 대야에 물을 가져다가 몸을 굽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참 사랑의 다섯 가지 특징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참 사랑은 희생적 이여야 하고, 말씀에 순종하여야 하며, 항상 진리를 말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행동과 그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친구를 사랑 할 때는 그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희생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왕에게 친구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며 언제든지 왕에게 나가 조언과 직언을 할 수 있는 특별한 관계를 갖습니다.  종은 왕에게 가까이 갈 수는 있지만 일방적으로 명령을 받을 뿐 어떤 조언도 할 수 없습니다.  그날 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종에서 친구로 올려 주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진정한 친구가 있습니까? 여러분을 위해 목숨 버린 그런 친구가 있습니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3-14)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오십시오. 그는 친구가 되기 위하여 우리 죄를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거룩한 옷을 입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