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불안한 삶의 경쟁에서 지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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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규 목사/시카고한마음재림교회 담임

 

성경에 보면 끝없는 노동에 시달리며 살아가던 민족이 있었습니다. 바로 애굽의 노예로 살던 히브리 민족입니다. 출애굽기 5장을 보면 백성들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는 모세를 향하여 격분한 바로는 짚을 주지 않고 벽돌을 만들되 하루의 만들 수량은 그전과 동일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지금 바로는 더 많이 거두어 더 큰 부와 재물을 쌓으려는 그의 세속적 욕심에 이스라엘 민족을 더욱 가혹하게 일하도록 몰아 부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쉼과 휴식, 곧 안식일을 빼앗긴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는 왜 벽돌을 만들도록 하였을까요? 이는 곡물을 쌓아 두는  국고(國庫)도시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출 1:11). 고대에는 대개 국가의 재물을 신전에 보관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의 우상들이 재물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많은 재물을 쌓아두기 위한 거대한 우상들의 창고를 만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에 보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20:4). 여기서 우상이란 일차적으로 눈에 보이는 신들의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말하지만 더 나아가서 우리들의 마음속에 여호와 하나님 보다 더 바라고 갈망하고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 어떤 것이든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즈음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우상은 무엇일까요? 물신숭배(Fetishism)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어떤 물건, 혹은 어떤 현상이나 대상에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물신숭배는 원시종교 특유의 신앙 형태로 큰 나무나 바위 혹은 거대한 자연현상의 모습을 보며 경외를 표하고 그것을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물신숭배의 사상을 사회과학적 개념으로 적용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칼 막스(Karl Heinrich Marx)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본주의적인 생산체제 아래에서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물건과 물건과의 관계로 나타나고 사회관계가 물상화되며, 물상적 의존관계로 변질한다. 그래서 본시 인간의 노동에 의해 만들어내는 생산물에 지나지 않는 상품, 화폐, 자본 등의 물질이 마치 고유의 힘을 지니고 그들 배후에 있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떠나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생각되고 상품, 화폐, 자본 등 인간 노동의 생산물을 신앙 또는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 이에 무릎을 꿇게 된다. 이와 같은 사태를 물신숭배라하고,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일상적 종교가 되어있다.”(두산백과) 그는 이러한 모습을 ‘상품 숭배'(commodity fetishism)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현대인들의 또 다른 우상숭배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현대는 ‘상품의 우상’을 만들어내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품의 우상을 더 많이, 더 좋게, 그리고 더 멋지게 만들어 내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상품을 추구할 수 있는 경제적 수단을 가지려면, 남보다 우월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출세를 위한 공부에 학생들은 지치고 부모들은 등골이 빠집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든든한 인맥이 있어야 하고 그것도 없으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남보다 몇배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은 쉬지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 아버지들은 피곤합니다. 나만, 내 아이들만, 우리 가족만 뒤쳐질까 불안한 이 삶의 경쟁에서 지쳐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안식이 없었습니다. 끊임없는 착취를 위해 생산을 요구하는 애굽의 우상들을 만들며 그들은 쉼도 없는 고역에 내몰렸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도 안식이 없습니다. 상품을 생산해 내야 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든 상품을 갖기 위해서 더 공부하고 더 노력하고 더 돈을 벌어야 하는 현대인들.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8). 평생을 우상을 만들고, 우상의 신전들을 만드느라 한번 쉬지도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는 우상을 만들 필요도 없고 그것 때문에 죽도록 고역을 치를 필요도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일주일 하루, 세상을 창조하시고 너를 구원했음을 기념하는 안식일에 와서 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혹 우리도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되야 하고, 내 자녀가 더 성공해야 하고, 더 좋은 집에 살아야 하고, 더 좋은 차에, 더 멋진 삶을 누려야 하는 삶의 경쟁에서 지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런 여러분들에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됐다! 그만 와서 쉬어라! 일주일 중 일곱째 날, 내가 너에게 축복과 평안을 주기 위하여 구별한 이 안식일에 너의 삶을 잠깐 멈추어라.” 불안한 삶의 경쟁에서 지칠 때 안식일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