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비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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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남수 목사(순복음충만교회 담임)

사람들은 누구나 대접을 받고자 합니다. 대접받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7장의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은 “그러므로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은 다른 사람 눈 속에 있는 티를 본다’(마7: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가진 작은 허물을 잘 본다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의 작은 실수나 허물을 잘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눈으로 본다’고 할 때 ‘보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판단하다’는 말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 단어들이 있습니다. ‘비판하다’, ‘평가하다’, ‘비평하다’, ‘분별하다’.등 입니다. 그리고 비판이라는 것은 옳다, 그르다, 악하다, 선하다고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의 비판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자신이 갖이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마6:2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성한 눈은 등불을 밝혀서 온 몸을 성하게 합니다. 건강하게 합니다. 그러나 눈이 병 들면 자기 몸을 밝히지 못하고 병들게 합니다.

병든 눈은 누구를 밝힐까요?

눈은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는데 자신의 눈은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 속은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찾아내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을 볼 수 있는 눈, 등불을 갖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 이 말씀은 남의 허물은 티끌까지 보이는데 자신의 큰 허물은 보지 않는다 그게 바로 외식하는 자(위선자)다’(마7:5)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는 말씀은 얼핏 들으면 ’비판 받기 싫으면 비판하지 말라‘는 말로 들립니다. 그 뜻이 아닙니다. ’선하다‘. ’악하다‘라고 하는 ’모든 판단‘을 예수님께서 내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뜻은 이것이다’라고 이미 비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있는 일은 예수님이 내리신 비판을 근거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이 ‘비판하신 근거로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2)는 말씀은 같은 기준으로 측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경 개역개정판에 있는 ‘티’와 ‘들보’를 영어성경 RSV는 ‘나무 조각’과 ‘통나무’로 번역했습니다. ‘나무 조각’과 ‘통나무’는 그 크기에 있어 엄청 다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작은 허물은 쉽게 발견하면서 자신에게 있는 널빤지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내로남불’이란 말을 자주 듣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신조어입니다. 자기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반성이나 뒤돌아 봄이 없이 남들이 하는 행동에만 집중하여 정작 본연의 모습을 잃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내로남불의 시대는 다른 이들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한 삶의 잣대를 댑니다

판단을 멈추고 남을 비판하지 말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분별력을 상실하고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올바른 분별력으로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등불을 켜고 살라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