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빈틈 있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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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환 목사(시카고기쁨의교회 담임)

카메라를 들고 산책을 나선다. 렌즈 너머의 세상은 언제나 낯설다. 저 곳에 저렇게 잘 생긴 나무가 있었던가? 우리 집 뒤뜰에 이런 들꽃들이 있었던가? 그동안 서운했을 풀꽃나무들에게 사과하며 렌즈에 조심스레 옮겨 담는다. 시든 꽃, 지는 꽃에도 이제야 눈이 간다.

시인 황선하는 “시들어가는 꽃을 보면, 놀라지 않게 조심스레 다가가, 입술에 닿은 깃털의 촉감 같은 목소리로 ‘아직 햇빛이 반할 만하오’라고 속삭여주어야지”라고 노래했다. 얼굴 주름 하나에 한숨 쉬고 ‘이제는 지는 인생’이라고 낙심하는 이가 있다면 꼭 들려주고 싶은 시다. 시인의 눈은 이토록 따뜻하고 세심하다. 어떤 것을 보아도 건성건성인 우리 눈과 얼마나 다른지. 소똥 굴러가는 것만 봐도 까르르 웃고 낙엽 떨어지는 것만 봐도 울던 여고생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작은 일에도 “우와!”를 연발하는 아이들의 마음에는 어른들이 잃어버린 ‘경탄’이란 것이 있다.

“모든 게 무덤덤해지고 시들해진다는 것,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저 그러려니 하는 것, 그것은 늙음의 징표이거나 타락의 징후이다. 경탄할 줄 안다는 것, 우리를 비인간화시키는 일체의 제도와 관습의 질곡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한 눈 파는 이들 말고 누가 세상의 아름다움 앞에 멈춰 설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유용성이라는 우상을 떨쳐버린 이들이 아니라면 누가 한눈을 팔 수 있단 말인가?” – 김기석, <아슬아슬한 희망>

신앙인들도 점점 무덤덤의 무덤에 갇힌 듯하다. 이제는 웬만한 설교에는 꿈쩍도 안하고, 좀 더 기발한 프로그램이 아니면 그저 그러려니 하는 시들함으로 인해 교회는 점점 자극적으로 변해 간다. 본래 예수 공동체가 가졌을 투박함과 담백함은 사라지고, 잘 짜인 조직과 목표와 프로그램을 갖춘 세련된 종교 단체가 남았다. 시골 교회 마루 바닥에 엎드려 음정 박자 다 틀리는 찬송 부르며 기도하던 시절의 ‘촌스러운’ 은혜가 나는 그립다.

아파트 사이사이/ 빈틈으로/ 꽃샘 분다// 아파트 속마다/ 사람 몸 속에/ 꽃눈 튼다// 갇힌 삶에도/ 봄 오는 것은/ 빈틈 때문// 사람은/ 틈// 새 일은 늘/ 틈에서 벌어진다. – 김지하, <틈>

굳은 땅을 비집고 올라온 작은 들꽃은 언제 보아도 기특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견한 건, 바위 틈 사이에서 ‘나 여기 있어요’ 하며 손짓하는 풀과 꽃이다. 그 틈 사이 여리고도 강한 생명이 말을 건넨다. ‘새 일은 늘 틈에서 벌어진다’고. 남에게 빈틈 하나 보이기를 싫어하는 우리를 다독이며, 남의 빈틈 하나 용납 못하는 우리 마음에 틈 하나 만드는 말이다.

시인이 말하듯, ‘갇힌 삶에도 봄 오는 것은 빈틈’ 때문이다. 꽉 찬 스케줄과 힘든 업무 속에서도 그 사이에 있는 틈 때문에 그나마 숨 쉬고 사는 것이다.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에 틈 하나 없다면 말씀이 꽃 피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빈틈 하나 없으니 경탄할 일이 없다.

빈틈을 두려워 말자. 빈틈없는 사람 재미없다. 빈틈 있는 교회가 희망차다. 아니, 교회가 틈이다. 죄와 악으로 ‘꽉 찬’ 이 세상에 균열을 내어 틈을 만드는 사람들, 세상에서 틈으로 존재하여 생명을 꽃피우는 사람들, 이름하여 ‘교회’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