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사람이 온다는 것

2090

손태환 목사(시카고기쁨의교회 담임)

사람이 상품이 되고 도구가 되는 세상이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그저 고객이고, 예배당에 앉은 교인은 교회 크기를 가늠하는 숫자가 되곤 한다. 차가운 TV 스크린에 잘 생기고 예쁜 젊은이들이 성적 대상이 되어 우리의 눈을 유혹한다. 그 자체로 목적이어야 할 사람이 수단이 되어 버렸다. 한 사람이 가진 어마어마한 가치가 효율성과 생산성으로 매겨지는 시대를 산다, 우리는.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정현종, <방문객>

사람을 상품과 도구로 삼는 시대에, 정현종 시인은 ‘사람이 온다는 것’의 의미 앞에 멈칫하게 만든다. 누군가 내게로 올 때,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함께 온다. 한 사람의 전 생애가 내게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이며, 수백 수천 번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함께 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위 시의 일부를 손 글씨로 써서 교회 정문 앞에 입갑판으로 세워 놓았다. 교회를 찾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형편이 어떠하든, 돈이 많건 적건,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사람이 온다는 건 이렇게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고백하고 싶었다.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그대의 일생을 안고 우리에게 와 주어 고맙다고, 낯선 땅에서 살면서 수 없이 부서졌을 그 마음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잠시의 방문이라도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머물다 가는 것이니 우리 모두 귀히 여기자고, 낮고 굵은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장석주 시인은 대추 한 알을 보고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며 그 속에서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를 세었다(장석주, <대추 한 알>).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노래해온 이 시대의 가객 홍순관은 쌀 한 톨에 스민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 빛’을 보고, 우주의 무게를 지닌 쌀 한 톨을 노래한다. 작은 것 속에 엄청난 것이 들어있다는 것은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이었다. 그분은 작은 겨자씨 한 알 속에서 새들이 깃든 큰 나무를 보셨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보잘 것 없는 소자에게서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는 것, 곧 믿음 아니던가.

대추 한 알에 담긴 하늘을 보는 사람, 쌀 한 톨에서 우주의 무게를 재는 사람이 누군가의 인생의 무게를 가벼이 여길 리 없다. 단 한 사람도 수단이나 도구로 여기지 않는다. ‘쓸모’와 ‘이익’으로 계산하여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 사람을 사용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여긴다. 교회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이렇게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긴다면, 교회는 조금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오늘은 만나는 이에게 이렇게 인사해보자.

“어마어마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