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생수와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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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목사(두란노침례교회 담임)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던 중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인종의 벽, 사회적 통념의 벽들을 깨고 여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주님은 품에서 생수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꺼내셨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생수를 흐르는 물을 뜻하는 일상 용어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깊이가 30미터나 돼 아무리 퍼 사용해도 전혀 문제없는 이 야곱의 우물이 여인과 마을 사람들에겐 생명의 젖줄이고, 그래서 고맙고 소중하기만 한데, 그 앞에서 지금 당장 존재하지도 않는 생수를 말하며 더 낫다고 하니 기분이 상한 겁니다. 그래서 당신이 야곱 보다 더 크냐고 쏘아붙입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이 귀한 우물을 폄하하는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선 여인의 무지를 인내하시며 생수의 의미를 계속 설명하십니다. 네가 소중히 여기는 이 우물물도 먹으면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생수는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단다. 그러자 여인의 대답은 더 독해졌습니다. 아이고 주님, 그런 물이 있다고요. 그렇다면, 그 생수를 지금 당장 주세요. 그러잖아도 때마다 물 길으러 오는 게 귀찮았는데, 그거 아주 잘됐네요. 어서 주세요. 여인의 비아냥 대는 태도까지도 주님은 끝까지 인내하십니다. 마시고 마셔도 또 목마른 인생, 즉 채우려고 아무리 애써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삶을 설명하기 위해, 이번엔 그녀가 삶에서 실제 겪고 있는 목마름을 지적하십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너라. 당황한 여자는 남편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채워지지 않는 성욕 때문인지, 궁핍한 경제 사정 때문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여자는 계속해서 남자가 필요했던 겁니다. 여자는 남자를 다섯번이나 바꿔 보았지만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삶을 살아온 겁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 우리도 그랬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100% 만족할 수 없는 공허한 삶을 살아온 겁니다. 주님께선 생수를 통해 그 공허함을 채우라고 가르쳐 주신 겁니다. 생수는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 순간, 공허한 삶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채워지는 겁니다. 파스칼은 팡세라는 책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람으로서는 메울 수 없는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 놓으셨다. 이 무한한 심연은 오직 무한하고 불변하신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두번째 가르침은 여인의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도대체 진정한 예배의 장소가 어디냐고 묻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예배자의 영적 신분과 태도라고 대답하십니다. 영적 신분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자, 즉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자들은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으니 예배 드릴 자격이 아예 없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소통할 수 있게 된 성도들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배는 구원받은 성도들만이 드리고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겁니다. 성도들은 예배 때마다 이 특권을 주신 하나님께 진심과 전심으로 감사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이어서 예배자의 태도를 강조하십니다. 신령과 진정(in Spirit and Truth)으로 예배 드려야 한다는 겁니다. 신령은 성령님을 뜻하고, 신령과 진정(진리)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과 16장 말씀에 따르면 성령님은 성도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님을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초할 때,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진리의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 영으로 찬송하고, 범사에 감사드리며 예배 드리게 된다고 증거합니다(에베소서5:19-20).

영혼이 생수로 넘쳐납니까? 진리의 영 안에서 참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100번, 1000번 묻고 그 답을 살펴야 할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