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쓸모없음의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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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환 목사(시카고기쁨의교회 담임)

평소에 시 좀 읽으시나요? 물으면 비슷한 답들이 돌아온다. “바쁘게 사느라 시 읽을 여유가 없네요.” “시는 어려워요.” 그때마다 좀 억지스럽지만 되묻고 싶어진다. 아무리 바빠도 계약서는 꼼꼼히 읽지 않는가? 아무리 어려워도 전공서적은 읽지 않는가? 결국 시를 읽지 않는 이유는 바빠서도 어려워서도 아니다. 먹고 사는데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시는 써먹을 데가 없다. 먹고 사느라 바쁜 현대인들에게 시는 시시하다. 시가 밥 먹여주나?

철학이나 문학을 한다고 하면 어른들이 묻곤 했다. “그거 배워 어디 쓴다냐.”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문학평론가 김현은 어머니의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모든 것에 가격을 붙이고, 사람도 자연도 얼마나 쓸모 있느냐를 묻는 세상이다.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림받는다. 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뒷방 늙은이가 되는 것, 다시 말해 쓸모없어지는 것이다. 시를 읽는다는 건, 사람의 가치를 쓸모로 판단하는 미친 세상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다. 시의 그 쓸모없음이 사람을 사람 되게 한다는 믿음이다.

목회도 ‘효율성’과 ‘유용성’을 논하는 시대를 산다. 이 프로그램이 교회 성장에 얼마나 유용한가를 묻는다. 교회 조직과 재정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영’되는지 평가한다. 목회자도 교인들도 ‘서로-사랑’이 아니라 ‘서로-사용’의 관계가 되었다. 교회를 성장시키지 못한 목사는 쓸모없는 목사로 여겨지고 결국 버림 받는다. 교회 일에 도움 되는 등록자가 더 환영받는 씁쓸한 풍경이 교회마다 펼쳐진다.

‘광야’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는 ‘미드바르’이다. ‘말씀’을 가리키는 ‘다바르’와 어원이 같다. 둘 사이에 공통점이 또 있다. 써먹을 수 없다는 것. 광야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땅이다. 먹을 것을 취할 수 없다. 말씀도 그렇다. 말씀 묵상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 자녀들 좋은 대학 보내주지 않는다. 말씀은 함부로 써먹을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하여, 바로 그 쓸모없음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로 광야를 걷게 하시고 말씀을 주신다.

작년에 방문한 인디애나폴리스의 한 미국교회 앞뜰에 풀이 무성한 공터가 있었다. 놀이터든 건물이든, 뭔가 활용하면 좋을 법한 땅을 그대로 방치해 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역 중에 하나란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로 두는 것. 이렇게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사역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였다. 그 교회는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누구라도 마음 놓고 갈 만한 교회라는 것. 아, 하나 더. 아마도 시를 좋아하는 교인들일 거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