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버지 날 Father’s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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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형 은퇴목사

미국이 6월 셋째 주일을 아버지날로 정하여 아버지를 기억하고 존중을 표시하지만 한국은 거의 모든 아버지가 훌륭하게 기억될 것이다.
경남 산청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들이 대구로 중학교에 갔다. 공부에 관심 없이 지나다가 1학년을 끝내며 68명 반에서 68등이었다. 아버지의 실망이 두려워 68을 1로 고쳐서 가지고 갔더니 아버지는 아들의 1등을 축하하고자 재산 1호 돼지를 잡아 마을 잔치를 하였다. 어설픈 거짓에 속아 재산1호를 처리한 아버지께 그는 너무 죄송하여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박사가 되고 대학교수를 거쳐 대학교총장이 되었다. 그의 아들이 중학교에 간 때 그는 아버지께 사죄하고 싶었다. “아버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인 것은 …” 아버지는 가로 막으며 “그만해라 다 알고 있다. 네 아들이 듣겠다.” 경북대학교 박찬석 총장의 이야기이지만 대개의 아버지가 그러하고 그 정신이 자녀에게 전해진다.
나의 아버지도 그 중의 한분이다. 그는 일제시대 19세에 결혼하여 오두막집에 신부와 모친을 두고 돈을 벌겠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년간 밤낮 노동을 하였지만 돈이 모아지지 않기에 이런 노동을 내 나라에서 해도 잘 살겠다고 확신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농협에서 융자하여 버려진 땅을 구입하고 부부가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상환과 융자를 반복하며 동리에서 잘 사는 집으로 변하였다. 정직과 성실 근면, 자수성가의 정신으로 일구어 낸 것이다. 해방 후 오래지 않아 장질부사에 걸리고도 조리를 잘하지 못하고 일을 하다가 후유증으로 다리가 불편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른 아침부터 일에 일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때 홍수 후 학교에 가다가 물에 빠져 옷이 흠뻑 젖어 집으로 돌아갔더니 아버지께서 호되게 야단을 치며 죽지 않으면 가야지 하며 쫓아 보냈다. 경주로 중학교에 보내며 아들을 위하여 집을 사서 어려움 없이 공부하도록 최선을 다 하셨다.
모친이 예수를 믿자 제사를 하지 않는다고 반대하여 불화가 있기도 했지만 그는 굽히지 않고 손자 나를 데리고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교회에 다녔다. 비가 오거나 추운 겨울에 교회에 가는 것이 염려되어 효심과 사랑으로 아버지는 동리에 예배당을 짓고 예배인도자를 초청하고 그를 접대하였으나 아버지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몇 년 후 운명 전에 아들의 손을 잡고 “내가 살았을 때는 네가 예수 믿지 않았으나 내가 죽은 후엔 너도 믿고 내가 가는 천국으로 오라”는 말을 남겼다. 아버지는 “내가 불효라 어머니 살아계실 때는 믿지 않았지만 유언을 지키고자 3년간은 믿겠다” 하시더니 담뱃대를 버리고 교회에 출석, 3년이 되기 전 주님을 만나고 평생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주의 종을 잘 섬겼다.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였으나 나는 목사가 되겠다고 하였더니 목사보다는 장로로 교회를 섬기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하면서도 나를 이해하고 받아 주셨다. 그는 관대하고 사랑이 많아 누가 도움을 요청하면 거절하질 않았다. 그는 시골에 살면서도 신문 라디오 텔레비 등으로 세계 정세를 알고 들려주며 또 내 이름을 위시하여 집안 친척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작명가 역할도 하였다. 그는 항상 내게 힘과 용기, 격려가 되고 그의 정신과 태도는 내게 남아있다. 그는 하늘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를 잘 보여주는 모범이라 기억하며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