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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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형 은퇴목사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곧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조선시대 정철의 시조를 우리가 읊으며 동감한다. 현실은 낳은 아버지보다 가슴에 품고 사랑으로 길러주신 어머님을 더욱 기억하고 기리기에 미국은 어머니주일을 크게 지키고 교회에서 교인들이 연중 세번째로 많이 모이는 날이 되었다. 아버지주일은 6월 세째 주일이나 그날이 있는 것마저 모르는 사람이 많다. 한국이 5월8일을 어머니날에서 어버이날로 바꾼 것은 아버지 없이는 어머니도 없다는 의미이겠다.

니카라과를 방문한 때 한 여인의 여섯 자녀는 아버지가 다 다르고 아이들 누구도 그 아버지를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있어 태어났지만 이들에게 아버지는 없는 것이나 같았다. 아버지로 생명이 태어나고 생명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오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는 자가 얼마나 되는가? 많은 사람이 아버지를 모르고 만나지도 못하면서 아버지를 찾아 만나고 싶어한다. 참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 기쁨이요 복이 아니겠는가!

아버지는 자녀를 가르치고 훈계하며 부모가 원하고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엄격하게 지도한다. 에티오피아에서 만난 한 외과의사에게 아버지는 매우 엄하였다. 그가 85점 성적표를 보여드리자 꾸중과 함께 매를 맞았다. 열심히 공부하여 클래스 최고 95점을 받아가니 5점만 더 맞으면 만점이 아니냐며 책망을 받았다. 무서운 아버지다. 그가 교회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배우자 그는 자기 아버지 같은 하나님은 싫다며 교회를 떠났다. 아버지의 징계가 무서운 것이나 그것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버지는 가장으로 가족을 책임지고 부양하며 필요를 공급하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경향이 있다. 로마시대 아버지는 폭군처럼 자녀들을 때리고 노예로 팔기도 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하였다.

이런 아버지를 아빠라고도 부른다. 아빠는 어린아이들의 용어로 아버지가 그를 낳은 것을 알고 그와 친근한 것을 나타내며 그의 호감을 얻고 자기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할 때에 사용한다. 내 외손자를 보니 그러하다. 아빠라면 사랑하는 자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응하곤 한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하지만 예수께서는 아빠 아버지라 불렀다. 예수께서 나기 전에 천사가 마리아에게 그의 탄생을 예고하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눅1:35) 하였다. 그가 12살에 부모와 같이 성전을 방문한 때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 하였다. 예수께서 세례 받는 시간 하늘이 열리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가 말씀하고 행하시는 것을 듣고 본대로 사역하시더니 십자가에 달리기 전 날 밤 그는 기도하며 아빠 아버지라 불렀다.

여기 아빠는 무슨 의미인가? 마음대로 하려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성인으로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자기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인함이다. 바울은 유대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열성으로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하다가 예수를 만나 성령과 아들의 영으로 다시 태어나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롬8:15 갈4:6)라 불렀다. 예수께서는 삶과 사역을 통하여 그는 아버지 품속에 있는 아들로서 아버지와 친밀함을 나타내다가 마지막에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자기 뜻이 아니라 아빠를 존중하고 온전히 순종하여 십자가에 나가기로 결단하는 아들의 모습이다. 바울도 복음을 전하며 박해받고 순교하기까지 순종하였다. 아빠는 존중과 순종을 다짐하는 표현이다. 아빠 아버지여라고 부르며 나도 기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