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케다(Aqedah)’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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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한마음재림교회 서상규 목사

미국에서 5월과 6월은 졸업 시즌입니다. 많은 학교들이 이 즈음에 졸업식을 합니다. 지난 6월 저의 아들도 고등학교를 졸업 했습니다. 늘 품 안에 아이 같았던 녀석이 졸업 가운을 입고 강당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보다 듬직하고 늠름한 모습에 새삼 흐믓 하기도 하고 웬지 서운하기도 합니다. 이제 곧 대학에 진학하면 부모의 품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부모를 떠나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며 살아야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졸업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의 마음에는 한 가지 걱정과 염려가 생깁니다. ‘과연 이 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것인가? 내가 믿는 하나님이 대를 이어 아들의 하나님이 될 것인가?’

창세기 22장에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이 이야기를 ‘아케다(Aqedah)’라고 부릅니다. 아케다는 히브리어로 ‘묶기’라는 뜻으로 아브라함이 자신의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에게 바치기 위해 제단 위에 묶어놓은 사건을 함축하여 표현한 용어입니다.

이제 아버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의 아들 이삭과 단 둘이 산 정상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의 손에 불과 나무는 들려 있었지만 제물로 드릴 양이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이상히 여긴 이삭이 질문을 합니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22:7). 두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아들이 물어볼까 염려하던 질문이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명령을 아들에게 숨길 수 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 이삭은 아버지의 대답을 듣고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제물도 없이 제사를 지내러 가는 모습 속에서 아버지의 대답과 그 표정을 통해 오늘의 제사는 다른 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자기 자신이 제물이 되어야 함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때 이삭의 나이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창세기 22장의 앞 뒤의 내용을 살펴볼 때 이삭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20세 전후의 건장한 청년이었음을 추측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5절에 이삭을 ‘아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아이라는 표현의 히브리어 의미는 ‘청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20세의 건장한 청년 이삭은 120세의 노인이 된 아버지를 이길 힘이 충분합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뿌리치고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믿음 때문에 왜 자신이 희생되어야하는가?’라고 저항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버지를 묵묵히 따라갑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창 22:8)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 의미심장한 단어를 사용하는데 바로 “함께” 입니다. 히브리어 ‘에하드(echad)’는 ‘한마음으로 한 사람처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마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면 아들도 아버지를 따라 신의 뜻에 따르겠다고하는 결심이 담겨져 있는 표현입니다.

아케다 사건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게 희생을 강요한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슬퍼하는 아브라함을 위해 이삭이 스스로 제물이 되겠다고 나선 사건입니다.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이제는 자신의 하나님 곧 이삭의 하나님으로 받아 들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대를 이을 신앙의 후손이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오늘 부모와 자녀들의 마음이 하나님 뜻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