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영원한 당신(Eternal T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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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목사(선한 이웃교회 담임/미육군 채플린)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4:15)

저는 지난주 호수와 초원이 그림같이 펼쳐진 레익제니바의 한 정원에서 아름다운 두 젊은이의 출발을 축복하는 결혼식을 집례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배우같은 선남선녀들이 들러리를 서고, 드디어 장미꽃잎으로 뿌려진 중앙의 통로를 따라 눈부시게 예쁜 신부가 입장을 합니다. 이때 돌연 축하객들을 놀라게 한 것은 신부와 함께 걸어나온 것은 사람이 아닌 그녀의 애완견이었습니다.  주저함도 어색함도 없이 당당히 개의 목줄을 잡고 걸어나온 신부는 사랑하는 신랑의 손을 잡고 주례자앞에 마주서게 되었습니다.  각자가 준비한 결혼서약의 글을 읽을 때는 웃음과 울음이 뒤범벅이 되어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성경에 자신의 손을 얹고 서로를 향해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도” 영원히 “너”와 함께하기로 약속할 때에 하객들은 뜨거운 축하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사실 인생은 “나” (I)의 “너”(Thou)를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너”를 만남으로 인해 삶은 꽃이피고 생기가 돋고 평화를 얻게 됩니다.

결혼 예행연습을 하면서 신부가 개를 데리고 입장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이유를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신부 가정사의 아픈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어린나이에 부모가 혜어졌고, 함께 살아온 어머니와는 모든 신뢰가 깨어진 상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딸의 결혼식에조차 부모가 참석할 지 모르겠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일에 개를 데리고 걸어나오는 신부의 발걸음이 당당하고 씩씩해 보였지만, 그를 바라보는 저의 맘 한구석이 몹시 아파왔습니다. 바로 어려서부터 함께한 그녀의 개는 깨어진 부모와의 신뢰의 아픔을 달래준 위로견이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이건 한국이건 Pet Business가 활발히 증가하는 추세인것 같습니다. 친밀감과 유대감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목마름이 팻을 가까이하게 하는 이유인듯 합니다. 전쟁경험으로 인해 PTSD를 앓는 베트랑들에게 정부에선Comfort dog을 보내주어 치료를 돕기도 합니다. 다른 치료행위를 통해 효과를 보지 못하던 것이, 위로견을 곁에 둠으로 상의병들이 많은 치료효과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보다 개가 낫다는 말이 이런 경우에도 통하는 듯합니다.

마틴부버는 사람관계에 있어 두방식의 형태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나(I)와 그것(It)”이란 관계성입니다.  인격적인 교감과 신뢰의 관계이기 보다는 상대를 자신의 필요와 수단의 대상으로 여기며 맺어진 생명력이 결여된 관계입니다.  둘째는 “나”와 “너”(Thou)의 관계입니다. 이는 상대를 향해 그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수용하고 인정하고 목적자체로 대하는 관계라 말할 수 있습니다. 부버는 서로서로의 인간관계를 어떠한 형태로 맺는가에 따라 그 사회가 얼마만큼 긍정적이며, 치료적이며, 서로를 성장하게되는 사회가 될 수 있는가를 결정짓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누군가의 “당신”되고, 나의 “당신”을 만나는 것이야 말로 인생의 행복이고 기쁨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목마른 세상에서 우리는 수없이 신뢰의 상처를 입고 탄식합니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편62:9)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이야말로 자신의 “당신”(Thou)에 목마른 여성이요, 거듭되는 관계의 상처속에서도 진정한 “너”를 찾는 고달픈 여정에 있던 사람였습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네명의 남자와 살아보았지만, 자신이 목말라하 하는 어떠한 친밀감도 무조건적인 신뢰도 쌓을 수 없었던 단지 서로의 필요를 추구하는 거래관계로 맺어진 “나”와 “너”이기보다는 “나”와 “그것”같은 생명력없는 관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지금 함께 살고있는 다섯번째의 남자조차 그녀의 “당신”이 되기에는 입김보다 가벼운 인생에 불과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같은 오랜 신뢰의 상처를 입은 여인에게 “영원한 당신”(Eternal Thou)과의 만남이 찾아옵니다.  그녀의 상처를 알고계시고, 목마름의 연유를 꽤뚫어 살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만든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준 만남”(Transformative Encounter)이 되었던 것입니다.(servant.sa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