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우리는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가?

1980

김주용 목사(시카고 기쁨의 교회)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가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 준다. 영화에서나 보는 퇴마 의식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예수는 귀신을 단번에 알아보고 즉각적으로 축귀하여 치유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지금 그 예수의 능력을 보여 줄 수 있느냐이다. 희안한 기도 방법으로 병을 고친다고 하고 하나님이 자기에게만 귀신을 보는 눈을 주었다며 종교 장사꾼같은 말을 하는 부흥강사가 온다고 하면, 그래도 나름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아직도 교회가 성숙하지 못한 것을 증명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사람들이 자신의 표적과 기적만을 보고 좇아오고 따라다니는 것에 한탄하고 안타까워 했다. 여전히 그런 예수의 한숨이 곳곳에서 나온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주인공이 감옥에서 만기출소할 때 한 목사가 그에게 두부를 주면서, “이 하얀 두부는 다시는 죄 짓지 말라고 먹는 겁니다”라고 하니, 그 주인공이 “너나 잘 하세요”라고 한다. 여전히 교회는 예수 잘 안 믿어서 병들고 신앙생활 잘 안 해서 비만이 되고 우울증에 걸린다고 한다. 그래서 종교적 신유 기도로 치유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세상은 과거와 다르게 이제 대놓고 “너나 잘 하세요”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가 더 병들고 예수 믿으면 더 우울해 지는 시대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한 대형교회는 교단법을 어겨가면서 목회자 세습을 했다. 연일 신문과 SNS에서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또 다른 대형교회의 목사는 논문 표절을 하고도 문제가 없는 듯 설교를 하고 현행법을 어기면서까지 교회 건축을 해 놓고 하나님의 법을 잘 지켜야 복 받는다고 버젓이 설교를 한다. 아무리 양보해도 종교인 과세를 교회가 반대할 이유가 없음에도 대형교회의 목회자들 중심으로 절대 세금을 낼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최근의 한국 교회 사태를 보며 교회의 한 청년이 “토가 나온다”고 할 정도로 추하고 더럽다.

그런데 교회와 목회자가, 더 나아가 예수를 믿는 성도가 예수처럼 귀신을 쫓아낼 수 있을까?  병든 자를 치유할 수 있을까? 교회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그럴 수 없을 것이고, 이제 그런 능력을 보여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교회의 현실이 반드시 개혁되고 변화되어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우리는 “예수”가 필요하고 “예수”가 요청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역술인협회의 보고에 따르면, 한국의 역술인(무당)이 20년 전보다 3배나 늘었다고 한다. 과학이 발전하고 문명이 진보하면서 당연히 점집과 역술원은 문을 닫고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도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결과는 그 반대로 나타났다. 90년대 전후로 무질서에서 질서로, 불확실에서 확실로, 종교에서 과학의 시대로 옮겨져 갈 것이라는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간 것이다. 도리어 사람들은 과학과 문명 속에서 질서와 확신을 찾지 못했고, 보이지 않는 세계인 종교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귀신은 커녕 교회 안에 위법과 적폐도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무당의 숫자가 3배로 늘어난 것처럼 기독교 성직자의 수로 증가했지만, 기독교인의 수는 줄어들고 있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이 교회 주변에 북적거리고 설교단에서는 편향된 정치적 발언이 하나님 말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목사들은 몇 푼의 돈으로 구제한다고 사진만 찍어대고 성도들은 지구 나이가 6천년이고 지구는 평평하다고 설교하는 목사 앞에 단 한마디 반문을 못하는 곳이 교회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군대와 같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걱정과 근심에 귀신들린 자처럼 살고 있다. 이 시대는 여전히 예수를 기다린다. 문제를 바로 진단하고 그 문제를 즉각적으로 처단할 수 있도록 사람을 세우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예수 정신을 가진 교회가 진정으로 세상 곁에 있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지금 점집과 무당에게로 가고 있다. 귀신들린 세상이 귀신으로 먹고 사는 자들에게 찾아가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깨어있어야 한다. 개혁하여 다시 능력을 회복하자. 아직 기회는 우리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