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우리 안의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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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환 목사(시카고기쁨의교회 담임)

이스라엘의 역사는 출애굽의 역사다.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 역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애굽의 종살이를 끝낸 후에도 그들의 출애굽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광야 백성들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를 그리워했다(출16:3). 바로의 폭정 하에 살던 시절을 “차라리 그 때가 좋았어”라며 미화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노예로 비굴하게 살아도 괜찮다는 말이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출애굽은 끝나지 않았다. 400년 넘는 식민 경험은 그들의 정신과 문화 속에 질기도록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라(신17:15)는 율법을 어기고 애굽의 병마를 계속 사들였다. 솔로몬은 애굽의 말들을 사들여 타국에 되파는 무역까지 하며 하나님의 말씀 대신 국가의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우선시했다(왕상10:28-29).

그 뿐이던가. 열강의 위협이 있을 때마다 이들은 언제나 애굽을 의지했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있었으나, 왕과 백성들은 애굽의 눈치를 보았고 애굽과의 연합을 도모했다. 자신들을 지배했던 애굽에서 벗어난 지 오래건만, 그들은 여전히 애굽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여, 이사야의 일갈은 그들의 역사 내내 유효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31:1).

이스라엘의 역사를 우리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일본이 있어서 우리가 근대화 되었다’라든지, 군사독재 시절을 추억하며 ‘차라리 그 때가 나았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성경을 되짚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출애굽기를 읽으며 나라의 독립을 꿈꾸었던 우리 믿음의 선조들로부터 우리는 어떤 유산을 이어받은 것일까?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반일감정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써먹으려는 정치인들을 보면 탐탁지 않다. 친일이든 반일이든, 친북이든 반북이든, 정치적 기득권을 위해 이념을 사용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한다. 이번 불매 운동이 나라의 경제나 국익에 도움이 안 될 것이라는 우려에 한편 공감한다. 이 사태를 풀기 위한 해결책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그러나 당장의 경제적 이익보다 중요한 것은 그 나라 국민의 정신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다 주기만 준다면 그 신이 여호와이든지 금송아지이든지 상관없었다. 농사만 잘 짓게 해 준다면 여호와이든 바알이든 누구라도 기꺼이 예배했다. 그것이 그들의 천박한 정신이었다. 나라 경제만 살려준다면 비리와 부패가 있어도 괜찮다며 지지하던 사람들에게서 보이던 바로 그것이었다.

역사학자 심용환은 최근 페이스북 글에서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과 1926년 물산장려운동이 끼친 역사적 영향력을 소개했다. 나랏빚 1,300만원을 갚겠다고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대한제국의 재정위기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운동이 이후 우리 독립 운동사에 끼친 영향력은 너무 분명하다. 물산장려운동 역시 사회주의자들의 반대에 직면하기도 했고 결국 민족자본가들이 가격을 올리며 무산되었으나, 이 노력이 훗날 금 모으기 운동, 신토불이 운동 등의 경제민족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이다.

옳다. 실패해도 좋다. 당장의 해결책이 되지 못해도 좋다. 불매운동에 동참하지 않는 이들을 비난하는 건 반대한다. 동시에, 불매운동 하는 이들을 보며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비난하지도 말자. 모처럼 나라의 기개가 보이니 반가운 일 아닌가. 우리 안의 ‘애굽’을 몰아낼 기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