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육신에 속한 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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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한마음재림교회 서상규 목사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고전 3:1-3) 고린도교회를 향한 사도바울의 권면이 담긴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것을 발견합니다.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을 예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영적이라기 보다는 육적인 성도들, 곧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영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권면하기를 시작하면서 아직도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음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한다는 매우 중대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첫째, 수년간이나 예수님을 믿고 살지만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에 머무르고 있는 육신에 속한 성도들, 둘째, 성령의 인도하심, 즉 성령의 온전하신 지배에 자기를 내어 맡긴 신령한 자들 곧 영에 속한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의 축복을 받고자 한다면 이 두 부류 가운데 어디에 속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육신에 속한 자들의 특징을 살펴 봅니다. 첫번째 육신적 삶의 특징은 유아기의 삶을 연속적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지도 걷지도 못하는 생후 백 일된 아기를 본다면 우리는 그 아기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돌이 지나도 그 아기가 전혀 성장하지 않았고, 또한 몇 년 후에도 성장을 멈춘 채 그대로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백 일째에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던 그 아기는 이제 그 부모와 다른 사람들에게 걱정과 슬픔이 될 것입니다. 아이가 자랄 수 없다니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생후 백 일에는 우유를 먹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우유 밖에는 먹지 못하는 유약한 상태라면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죠. 지금 사도바울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모습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믿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기로 결심하여 그 인생을 새롭게 시작은 했으나 아직도 하늘나라에 속한 삶을 살아가는 영적인 진보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5년, 10년, 혹은 20년이 되었다는 그리스도인들이 아직 거룩한 성장도, 영적 능력도, 믿음 있는 자의 성숙함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이것은 슬픈 일입니다.

둘째, 육신적의 삶의 특징은 지속해서 죄로 인한 영적 실패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 사도바울은 시기와 분쟁, 곧 다툼과 질투가 드러나는 사람을 향하여 육신에 속하여 사는 사람이라고 권면합니다. 10년, 20년 아니 그 이상의 세월을 그리스도인으로 살았어도 내 안에 있는 죗된 자아와의 싸움에서 번번히 패배하고 쓰러지고 실패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우리가 여전히 육신에 속해 있어 하나님의 성령께 올바로 자신을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육신적 삶의 특징은 은사와 열매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는 같은 듯 하지만 다릅니다. 어느 목사님이 성령의 은사와 열매에 관한 설교를 한 후 청중들을 초청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위해 기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강단의 왼편으로 성령의 열매를 위해 기도 받기 원하는 사람은 오른편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수 십명의 사람들이 왼편으로 모였고 오른편에는 단 세 사람만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R. T 켄달 “내일의 기름부음” 중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성령의 열매 보다는 은사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없이 사용되는 은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지금 고린도교회의 모습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12장과 14장에서는 성령의 각종 은사와 능력들이 그들에게 임했음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령의 열매의 아름다운 감화력이 드러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 사역자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잘 가르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잘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노래를 잘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음식을 잘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봉사활동을 잘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런 우리들이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 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