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주기도문 여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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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목사(두란노침례교회 담임)

오늘은 주기도문 중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부분을 묵상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주기도문 중 이 부분을 제일 부담스러워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준 것같이” 이 부분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고 또한 용서할 수 있는 방법도 안다면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을 겁니다.

먼저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이 기도 내용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화평을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통해 이루신 화평은 십자가의 형상이 말해줍니다. 수직의 화평,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평, 그리고 수평의 화평,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평을 이루신 겁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가로막고 있던 죄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신 겁니다. 그렇게 이뤄놓으신 화평 중 가장 깨지기 쉬운 화평이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7장이 기록해둔 마지막 기도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제자들의 하나됨을 위해 간구하셨던 겁니다. 우리 주님은 그렇게 교회 공동체의 화평을 위해 희생하셨고, 또한 그 화평을 위해 기도하신 겁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의 화평을 깨는 주범이 바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인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생긴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이 바로 용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용서를 하나님께 간구 드려야 할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께 회개 기도 드릴 때 반드시 먼저 이뤄야 할 조건으로 못박아 두신 겁니다. 이제 이유를 아셨으니 주님의 십자가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용서에 힘쓰는 자가 되길 바랍니다.

자 이번엔 용서의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첫번째 길은 예수님의 비유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임금으로부터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종이 있습니다. 한 달란트의 가치가 지금 돈으로 약 16만 달러 정도니까, 비유를 듣는 제자들에게 만 달란트는 상상으로도 가늠이 안 될만큼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주님께서 만 달란트의 빚을 비유에 사용하신 의도는 종이 임금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무한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그 종이 집으로 돌아가다가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자 멱살잡이를 하며 갚으라고 다그칩니다. 100데나리온은 종이 탕감받은 빚의 50만분의 1에 불과한 아주 적은 돈입니다. 빚진 자가 사정사정 했지만, 종은 다짜고짜 그를 끌어다가 자기 집 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갚기 전엔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임금은 진노하여 당장 그 은혜를 모르는 종을 잡아다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라고 명령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무한한 은혜만 잊지 않으면 용서 못할 일이 전혀 없는 겁니다. 두번째 길은 은혜의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주신 새언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새언약의 첫번째 내용을 의미적으로 해석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이렇게 오신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5장과 6장은 성령 충만한 자의 삶을 그리고 있는데, 그 첫번째가 교회 안에서 서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화답하는 장면 입니다. 성령 충만한 자들이 모인 교회는 수평적 화평을 누리고 유지해가는 겁니다. 용서해야 할 일은 아예 잘 생기지도 않고,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함께 하신 성령님께서 용서할 수 있도록 지혜와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의 화평, 성도들 사이에 화평이 넘치는 곳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 화평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 위에서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이 분명한 사실을 기억하고, 섬기는 교회의 화평을 위해 용서를 용기있게 실천하는 주님을 꼭 닮은 삶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