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신령한 눈(Spiritual Perce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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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목사 (선한 이웃교회 담임/미육군 군목)

 

땅과 하늘이 맞닿은 곳을 보는 것은 가히 황홀한 경험입니다. 해발 3천 미터가 넘는 산지에 형성된 어마어마하게 큰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이 바로 그와같은 곳이라 들었습니다. 소금호수에 비친 파란 하늘은 어디가 땅이며 어디가 하늘인지 도저히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땅과 하늘이 맞닿아 붙어있어 신비한 광경을 연출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치 소금 벌판에 서있는 사람의 모습이 하늘 한가운데 들어선 착각을 가져다 주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하늘의 세계와 맞닿아 있음을 깨달아 볼 줄아는 안목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그 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함께 맞닿아 있음을 아는  지혜입니다.

 

간혹 극장에서 3D 영화를 보게 되면, 그때 극장에 입장하면서 입체영화를 즐길 수 있는 안경을 받아가지고 들어갑니다. 물론 유니버셜 스튜디오 같은 곳에선 영화의 현장속으로 집적 들어가 피부적으로느낄 수 있도록4D 형태의 체험을 경험하게도 합니다. 평면의 화면에 비춰진밋밋한 영화가3D 안경을 착용했을 때는 마치 영화의 액터가 눈앞까지 튀어나오는 생생한 스릴을 체험하게 합니다. 어떤이들은 너무나 생생한 영화의 입체감에 놀라 몸을 피하고 눈을 아예 감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우리의 신령한눈이 새롭게 열릴 때, 우리가 사는 세상속에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이 함께 하심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곧, 이땅의 세계가 하늘에 맞닿아 있다는 깨달음을 체험케 되는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형인 에서를 피해 광야길로 도망하며,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서 돌을 베개삼아 잠을 청할 때 일어난 일과 같습니다. 그가 꿈속에서 하늘에 맞닿은 사닥다리위로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광경을 보고는 자신이 잠을 청한 그곳이 다름아닌 하늘에 이르는 현관이요 하나님의 집임을 깨닫고선 그곳을 ‘벧엘’이라 이름한 것과같은 체험입니다. 단지 알몬드 나무만이 무성했을 ‘루스’라는 땅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신성한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창28)

 

예수님을 처음 대면했던 니고데모라는 사람도 처음에는 이세상의 관심과 이치에만 영리한 선생이었지, 영적인 것엔 무지한 사람였던 것으로 요한복음은 소개합니다. 이 영적세계의 무지는 우리로 철저히 세속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살도록 만듭니다. 신령한 세계가 사라져버린 인생은 오직물질숭배와 자기경험만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합니다.그러므로 니고데모는 사람의 변화나 사람이 거듭나는 이치에 대해선 우매하였습니다. 인간생명의 탄생도 기적같은 경이로움이지만, 그의 생각엔 나이 들어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가히 불가능한 사건였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곧, 의문과 희의로 가득찬 태도로 반문하였던 것입니다. 그에 눈엔 여전히 성령의 감동으로 일어난 수많은 변화의 간증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속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거나,관여하시고,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는 이세상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그같은 사고에갇힌 사람들의 이해의 한계입니다. 그같은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는 하늘의 이치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곧, 인생이 거듭나는 사건은 성령의 역사이며, 이 세상의 배후에 하늘의 역사가 함께 맞닿아 있음을 볼 줄아는  신령한 눈이 뜨여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땅과 하늘이 맞닿은 우유니 소금사막과도 같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황홀한 땅입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의 세계는 멀리 떨어진 별개의 공간이 아닙니다. 하늘에 이르는 문은 마치 야곱의 사닥다리처럼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의 현장속에 여전히 열려져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벧엘”을 경험하시는하나님의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Servant.sa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