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치밀한 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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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목사 <시카고 기쁨의 교회>

구약시대의 율법 가운데 부지중, 곧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지은 죄에 대한 속죄 제사(속건제)의 규례가 있다. 그러나 그런 죄가 있을까? 모르고 지은 죄와 잘못된 것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범하는 악한 행동이 있을까? 종교적 의식과 더불어 도덕과 윤리에 대한 인류의 정신적 진보가 있기 전에 인간은 ‘모르고 지은 죄’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무엇이 옳고 그름인지 분명히 파악이 되며, 때로는 문화의 다양성조차도 보편적 정의를 뛰어넘을 수 없는 상식과 당위를 기본으로 알고 있는 이 시대에 부지 중 지은 죄와 잘못을 인정해 주시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즉, 현대 시대의 종교적 죄인은 거의 대부분 치밀한 계획과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우리는 모두 치밀한 죄인이라는 말이다.

다윗은 치명적인 죄과 하나가 있다. 충신인 우리야 장군의 아내인 밧세바를 간음한 것이다. 그런데 그 죄과는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다윗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단숨에 성범죄자의 인식을 지우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되는데, 바로 그것은 그의 치밀한 죄성 때문이다. 밧세바의 유혹과 다윗의 마초적 본성 때문에 지은 범죄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 은혜를 값싼 싸구려 종교 면죄부로 만드는 것이다.

사무엘하 11장 2절을 보라.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고 증거한다. 한 밤에 낮처럼 밝은 전기불을 주는 이 시대에도 밤에 옆집을 몰래 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다윗의 시대에는 밤을 밝히는 불이 있던 시대가 아니다. 또한 다윗이 올라가 있는 “왕궁 옥상”은 사방을 살펴 볼 수 있는 파수대의 탑과 같은 곳이 아니라, 왕이 하나님에게 기도하던 골방과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다윗이 밧세바의 목욕 장면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 장면이 너무도 아름다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당대 타락한 지도자나 무지몽맹한 왕이나 임금을 풍자할 때 사용한 것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와 같은 문학적 비판우화라는 것이다. 다윗이 어둡고 캄캄한 밤에 밧세바의 목욕 장면을 보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사무엘하 11장 2절의 말씀은 곧 다윗은 밧세바를 간음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우회적으로 비꼬듯 말하는 것이다. 그 의미는 다윗은 우발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통해 악을 행했다는 것이다. 밧세바도, 남성의 본능도, 그 어떤 타자적인 대상도 결코 다윗의 죄과의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밧세바를 음행한 것은 다윗 그 자신이고, 이를 위해 그는 음흉하고 은밀한 계획적 범행을 했다는 것을 성경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가끔 그리스도인들은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를 모두 용서해 달라고 한다. 그러나 모르고 지은 죄가 어디 있는가?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죄과를 타인과 사회적 구조로 넘기고자 하는 게으른 신앙인들의 회개가 교회를 썩게 하고 있다. 대형교회를 아들에게 물려 주려고 하는 목사와 그 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하나님 탓”을 돌린다. 한국의 성추행범 목사와 그가 속한 교단은 그의 간음죄를 “밧세바와 같은 여자 탓”이라고 돌리면서 여전히 목회를 하고 있다. 은퇴를 앞둔 한 목사는 인간적인 욕심으로 교회를 풍비박산을 만들고는 “몇 사람의 미꾸라지와 같은 성도들” 때문이라고 남 탓하고 있다.

누구 탓 하지 말라. 우리의 죄는 다윗이 밧세바를 범할 때와 마찬가지로 치밀한 계획에서 이뤄진 것임을 깨닫길 바란다. 모르고 지은 죄라는 것은 없다. 아니, 이제는 적어도 나에게는 없다고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다윗의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치밀한 죄인이다. 모르고 지은 죄를 용서 받기 위해, 예수가 거룩하게 흘린 십자가의 보혈을 중세 값싼 면죄부로 만들지 말라. 철저히 회개하라. 죄의 내용을 낱낱이 고백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