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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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목사
시카고 기쁨의 교회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78장)에 “나라의 굴욕을 받는 자는 그 나라의 주인이라 하며, 나라의 재앙을 받는 자는 천하의 왕이라 한다”고 나온다. 곧 지도자는 굴욕과 비판을 받는 자이고, 더불어 나라를 위해서라면 어떤 비난과 수모까지도 감당할 수 있는 자가 될 때, 바른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미국 TV 프로그램에서 대통령을 비롯해서 유명한 공인들이 자신들을 향한 악플을 직접 읽고 지혜롭게 반응하며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다. 높은 자리에 앉은 자에게 비판과 문제제기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도자는 그 비판과 원망, 불평에 대해 지혜롭게 응대하는 보여주어야 한다.

필자는 한 교회의 담임 목사다. 원망한다면,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옆 교회의 교인들이? 다른 종교인들이? 아니다. 필자가 목양하는 성도들이 수많은 불평과 불만을 토로한다. 그리고 필자는 당연히 성도들의 문제제기와 비판을 모두 들어주어야 하고, 때론 토론과 대화를 통해 더욱 좋은 것을 찾아 가야 한다.

그렇다면, 인생의 문제가 생겨서 삶의 근원적인 불평과 불만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누구에게 그 문제를 제기하겠는가? 종교를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의 절대자 곧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을 할 것이다. “신이시여, 어찌 나에게 이런 지독한 질병을 주십니까?” ‘하나님! 왜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합니까?” “주여, 어찌 이렇게 가난하게 하십니까?”

세상 사람들이 원망을 한다면, 최종적으로 그것을 듣게 될 존재는 우주 만물을 창조한 신, 곧 하나님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서 가슴을 치며 피를 토하듯 쏟아져 나오는 생(生)에 대한 원망과 불평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고난에 대한 문제들” 때문이다. 따라서 그 고난에 문제에 대해서 우리 인간은 신을 비난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성경은 “고난 당한 것이 네게 유익이라”(시편 119:17)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라고 믿는 예수에 대해서, 성경은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히 2:18)고 설명한다.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대접받고 영광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 삶의 깊숙한 고뇌와 번민, 아픔과 고통에 대한 인간의 수많은 질문에 길을 찾게 하고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이지만, 스스로 인간과 똑같이 고난과 고통을 받는 것으로 아픔과 상처 속에 있는 인간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고난에 눈물 짓고, 아픔에 괴로워하고 있다. 종교가 있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자이든 고통의 문제 앞에 인간은 모두 동일하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과 고통 가운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할 때, 하늘을 향해 원망하고 비난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불경하고 무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고난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누구에게 이 아픔을 호소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밖에 없지 않는가?

이런 비슷한 상황을 일본의 소설가 엔도 슈샤큐는 “침묵”이라는 책에서 이야기한다. 17세기 일본에 기독교를 전하고자 했던 한 예수회 선교사가 막부 영주들에게 잡히게 되었다. 고문을 하는데, 선교사에게 직접 하지 않는다. 대신 선교사가 전도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일본인들을 붙잡아 와서 한 사람 한 사람씩 선교사가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죽인다. 그러면서 영주들은 선교사에게 배교하지 않으면 계속 사람을 죽이겠다고 한다. 그때 그 선교사는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한다. “왜 저들을 죽게 하십니까? 차라리 저를 죽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고하고 무거운 침묵을 지킨다. 끝내 선교사는 예수의 성화를 밟고 배교를 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나를 밟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서 이 땅에 왔느니라.” 이 소설의 마지막 구절이 지금 우리에게는 이렇게 들린다. “나를 비난해라. 나는 너희들에게 비난 받고 원망을 듣기 위해서 이 땅에 왔느니라.”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은가? 원망하고 비난하라. 그러나 절대 그 고난을 허무와 절망에 빼앗겨서는 안 된다. 고난은 다시 믿음을 찾게 할 것이다. 아픔이 깊어질수록, 사랑도 강해지는 것처럼, 고난의 깊이로 더욱 삶의 의미를 바로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