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하나됨을 지키라: 겸손과 온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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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목사(두란노침례교회 담임)

주님의 제자들은 소명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소명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겁니다. 에베소서 4장 말씀은 그 방법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먼저 서로를 대하는 태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첫번째 모든 겸손입니다. “모든”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철저한 겸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늘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처음 겸손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을 때 거부감이 컸을 겁니다. 그 당시 사회에선 겸손하다는 말을 비굴하다, 비열하다, 노예 근성이 있다, 이런 뜻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당신을 겸손하고 온유한 자라고 소개하고, 겸손을 행하라고 가르치실 때, 기존의 생각 때문에 갈등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갈등은 지금도 이어집니다. 자기 과시와 겸손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성도들이 제법 많은 겁니다. 그렇다면 겸손은 어떻게 이룰 수 있는 걸까요? 나아만 장군 이야기를 통해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아람 나라의 대장군, 나아만은 문둥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여종으로부터 선지자 엘리사라면 문둥병을 고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듣고 직접 찾아갑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사환을 통해 “요단 강에서 7번 몸을 씻으라.”는 말만 전합니다. 나아만은 불같이 화를 냅니다. ‘그 먼 길을 직접 온 한 국가의 대장군을 감히 이런 식으로 대하다니.’ 자존심이 크게 상한 나아만은 당장 돌아가려고 했지만, 지혜로운 부하들의 적극적인 만류에 못 이겨 요단 강으로 갑니다. 물에 들어가기 위해 나아만은 자신이 대장군임을 표시하는 모든 것들을 걷어내기 시작합니다. 말에서 내려 검을 내려놓고 투구를 벗고 전쟁터를 누비느라 몸의 일부처럼 된 갑옷을 벗어버립니다. 그러자 나병이 퍼진 부끄러운 몸만 덜렁 남고 말았습니다. 나아만은 요단 강에서 몸을 씻는 동안,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겁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여, 이 불쌍한 자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창조주 하나님 앞에 진솔하게 설 때 교만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도 모두가 이 겸손함으로 종의 자리로 내려가 서로를 섬길 때, 교회는 하나됨을 유지할 수 있는 겁니다.

두번째는 온유입니다. 당신을 온유하다고 표현하신 주님의 삶을 통해 온유함의 참뜻을 배울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주님은 모두를 관대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주님에게 대항하고 힘들게 하는 유대교 리더들도 그렇게 대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도, 주님을 십자가로 내몬 유대인들을 용서의 마음으로 대하셨을 정도입니다.

그런 주님께서도 화를 내신 적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성전을 청소하실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선 만민이 성전에서 기도할 수 있도록 이방인의 뜰을 두게 하셨는데, 그곳을 돈벌이 수단으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도 유대인 이방인 구분 없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인데, 유대교 리더들은 하나님의 큰 뜻에는 관심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진노하셨던 겁니다.

자신의 공격과 대적에 대해선 하염없이 관대한 주님이셨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세력에 대해선 아주 엄격하게 대하셨던 겁니다. 이것이 온유의 참뜻입니다. 원문에서 겸손과 온유를 동전의 양면처럼 붙여 놓은 이유가 있습니다. 두 성품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온유가 겸손을 보완하기 때문입니다. 종이 되어 섬기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내선 안 됩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일이 생겼을 때, 겸손함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라면 분연히 나설 수 있는 온유함이 필요한 겁니다.

우리도 주님을 닮아 겸손과 온유를 다 갖추고 서로를 대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 즉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유지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