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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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 나눔교회 담임)

양화진에 묻힌 홀(Hall) 일가 묘비에 이런 성경구절이 적혀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글귀는 읽는자들로 하여금 심금을 울린다. 로제타 셔우드 홀이 선교사로 결심하게 된 이유는 미국 최초로 여성을 위한 대학인 마운트 홀요크 여자 신학교를 세운 메리 라이언이 졸업하는 제자들에게 해외선교를 적극 권장했다.“인류를 위해 봉사하길 원한다면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곳으로 가서,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일을 하라.”이 말이 자신을 해외선교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썼다. (1892년 로제타 일기) 그녀는 펜실베이니아 여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빈민가 병원에서 근무 하다가 이곳에서 남편 윌리암 제임스 홀을 만나서 미국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회(WFMS)의 파송으로 1890년 10월 조선땅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처음 사역의 첫출발이 보구여관(保救女館)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병원이다. ‘보호하고 구하는 여성들의 집’이라는 뜻으로 명성황후가 이름을 하사했던 곳이다. 이 병원은 1887년 메타 하워드라는 여의사가 파견 되면서 문을 열고 2년 후 그녀가 병으로 귀국한 후 로제타 홀 선교가 후임이 되어 일하게 되었다. 남편은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발발하는 시기에 평양의 환자들과 부상자들을 돌보았고 학교사역 및 여러사역에 건강이 악화되는 줄도 모르고 헌신 하다가 결혼한지 3년되던 해에 병으로 죽었다. 그후 딸 에스더도 풍토병으로 죽게된다.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는 그 딸을 남편 묘 옆에 묻으면서 결심을 하게 된다. “하나님, 저는 비록 이 땅에서 사랑하는 남편과 딸을 잃었지만 내 아들 셜우드 홀과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약속대로 홀의 가문은 조선 땅에서 73년동안 봉사했다. 특히 그녀의 아들은 한국 결핵 퇴치에 앞장섰던 셔우드 홀 박사이다. 로제타 그녀는 최초로 평양학교에 시각 장애인 반을 개설하여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시초가 되었다. 청각 장애인과 언어 장애인을 위해 ‘게암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조선땅에 턱없이 부족한 의사 모집을 위해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 선교회에 더 보내 달라고 요청하고, 장로교와 의료 선교 사업의 통합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후에 조선 여성이 공부해서 백성에게 도움이 되도록 의학 훈련반을 개설해 여성을 위한 의료활동’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여의사 교육을 시작했다. 또한 여러 명의 여성이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도록 돕고 그들이 조국에 돌아 와서 여의사로 활동하게 했다. 특히 제자중 박 에스더는 볼티모어 여성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여성 최초의 서양 의사로 활동하다가 조선 땅에 돌아와서 로제타 홀의 동역자로 함께 사역 하다가 결핵에 걸려 34살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로제타 홀 선교사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을 정도로 누구도 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을 모험을 걸었다. 그녀의 흔적은 그가 설립한 경성여전, 수도의대, 동대문병원(현 이대부속병원), 현재고려대 의과대학, 인천 기독교병원, 인천간호보건대학에서 찾아볼수 있다.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가 조선땅에 와서 여성의 건강권 보장에 선구자 역할을 하게 배경에는 아버지와 그가 공부한 학교 영향이 매우 크다. 로제타의 아버지 로즈벨트는 1882년, 음주절제운동 차원으로 살롱을 추방하는 데 앞장 섰으며 흑인 노예해방에도 적극 관여했다. 그녀가  공부한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 대학은 기독교 단체들이 뜻을 모아, 이 지역에 거주하는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을 교육하는 빈민 구제학교로 출발 했으며 남녀 평등과 노예해방 운동과 여성 참정권운동을 처음 시작한곳이다. 이렇게 약자에 대한 진정한 보살핌과 사랑을 보고 배우면서 성장했고 일평생을 조선땅 우리민족에 와서 어둠 속에 있는 여성들을 교육으로 깨우는 역사의 등불이요 예수님의 삶을 보여 주었다.

※참고문헌: 바울 선교회 선교사 열전/선교 이야기, 백과사전, 월간조선(2015년 10월 인물탐구), 신앙의 위인(제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