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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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 나눔교회 담임)

캐드월러드 빈튼(Cadwallader C. Vinton)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들의 무덤은 어린이부터 어른, 남녀 노소할것없이 양화진에 조용하게 잠들고 있다. 무덤 그자체가 무엇인가 암시 하듯이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다. 그들은 살기위해 조선땅에 온것이 아니라 예수를 위해 죽기위해 조선땅을 밟았다. 선교사들은 이방땅에 선교의 사명을 받고 조선땅에 왔다고 하지만 MK 자녀들은 선택권 없이 부모에 따라 혹은 조선땅에 태어나 질병과 전염병으로 젊음의 꽃을 피지 못하고 조선의 한줌의 흙이 되었다.

자녀 모두를 잃은 대표적인 선교사가 캐드월러드 빈튼 선교사 가족이다. (Cadwallader C. Vinton), 빈튼의 아들 Walter(1살)와 Cadwilard(4살), 그리고 딸 Mary(6개월) 세 자녀와, 부인 레티샤 빈튼 (Lefitia) 마저 1903년에 생명을 잃어 자녀들과 같이 양화진에 묻혔있다.

빈튼은 1891년 4월3일에 부인과 함께 미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파송을 받아 공석이 된 제중원에 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탁월한 의술을 가진 의사이었지만 그는 선교사로 열정이 더 강했다. 당시 제중원은 왕립 병원으로 복음 전하는 선교는 국법으로 금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부가 마련해준 자신의 집에 진료소를 차리고 환자 진료를 하면서 선교 활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의사로서 역할은 환자 진료였지만 궁극적인 목적이 선교사로 제중원을 선교의 거점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자신의 진료소를 개원하여 의료 활동이 단순히 전도활동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않고 영혼 구원만큼 육체를 치유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무료진료와 한강변을 순회하며 환자를 치료하는 열정을 가졌다. 결국 자신의 선교 사역에 전념하기 위하여 제중원을 사임하게 된다.

빈튼은 의료 경험을 바탕으로 미북장로회 선교 공의회에 10개항의 선교정책을 채택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선교 방법이 반영된 ‘선교정책’ 몇가지 내용을 소개 한다면 전도의 목표를 상류층보다도 하류층에 두며, 의료 선교사들이 환자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환자 마음속에 깊이 감동을 받을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했다. 또한 장기간 임원 했다가 퇴원한 환자들을 심방하여 사후 상황을 계속 돌보므로 복음의 접촉할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했다.

빈튼의 선교 사역은 다양하다. 1893년 조선성교서회의 무보수 총무를 맡으면서 문서선교의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언더우드가 발행한 장로교 최초의 신문 ‘그리스도 신문’의 편집인이 되었고 후에는 장로교의 선교 잡지와 감리교에서 발행하는 선교잡지를 통합하여 코리아 미션필드로 만드는데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상임성서 실행위원회가 성경 보급사업을 위하여 빈튼을 관리인으로 임명하여 각 성서공회에 공급하는 역할을 하며 당시’로스역’성경에 대하여 논쟁이 일어날때 성경개정의 필요성을 확산 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외에도 한국에 나병환자 사업을 위하여 타당성을 조사하기 위하여 위원회를 구성하고 한국에서 최초로 나병환자를 치료하는 사업이 이루워지게 했다. 빈튼 선교사는 조선땅 복음화를 위하여 영혼의 사랑과 열정과 추진력으로 다양한 선교의 초석이 되었다.(참고문헌: 한국 기독교 의료사, 한국 개신교 초기선교와 교회선장, 미국 북장로교 한국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