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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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 나눔교회 담임)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법칙을 루비 R. 켄드릭을 삶을 통하여 교훈을 받게 된다. 그녀는 조선땅에 작은 밀알이 되었지만 지금도 많은 교회와 젊은이들에게 선교가 무엇인지를 몸소 그의 삶을 통하여 일깨워 준다. 루비 R. 켄드릭은 1883년 1월 28일 미국 텍사스에서 출생하여 캔자스에 있는 여자 성경 전문학교를 입학하여 1905년 6월에 졸업 하였다. 영혼을 사랑하며 신실한 믿음을 가진 그녀는 선교의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미국 남감리회에 선교사로 지원 하였으나 연령 미달로 허락되지 않했다. 그후 2년을 기다리면서 1년은 교사로, 1년은 대학교에서 특별 과정를 수학한 뒤 1907년 9월 텍사스 엡윗 청년회 후원을 받아 처녀의 몸으로 미국 남감리회 해외 여선교회 선교사로 파송받게 된다. 한국에 들어와서 황해도 개성에서 여학교 교사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한국 생활을 적응하기 위해 한국문화와 언어를 배우고 선교사역의 열심히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교 사역을 펼치지도 못하고 급성 맹장염으로 9개월의 투병끝에 1908년 8월 15일 25세의 젊은 처녀 선교사로 순교하여 양화진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의 선교 사역이었지만 양화진 묘비에 적힌 글귀는 한국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내게 천개의 목숨이 있다면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칠 것입니다.)

이 비문은 그녀가 살아 활동할때에 후원하는 택사스 엡윗 청년에 보낸 편지속에 있었던 내용이다. 이 선교 편지는 엡윗 청년회가 연합집회를 열고 있었을 때 전달받고 그녀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에 감격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 편지를 받고 다음날 엡윗 청년들은 그녀가 소천 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집회에 참석자들은 말로 표현 할수없는 슬픔에 빠지고 눈물 바다를 이루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전에 남긴 간절한 부탁! “ 만일 내가 죽으면 택사스 청년들에게 가서 10명, 20명, 50명씩 한국으로 나오라고 일러 주세요” 그녀의 유언은 당시 모임에 참여했던 젊은이들에게 큰 감동이 되어 참석자중 20명이 한국 선교사로 자원하는 결단을 하게 된다. 그 후부터 텍사스 엡윗 청년회는 해마다 헌금하여 한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후원했다. 비록 그녀는 당시 이름도 없이 빛도없이 사역을 펼치지는 못했지만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했다. 한국 백성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헌신과 열정이 미국에 젊은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다. 그의 부모님에게 마지막 보낸 편지에도 일편단심 한국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녹아져 있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 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작은 씨앗이 되어 이땅에 묻히게 되었을 때 아마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조선 땅에는 많은 꽃들이 피고 그들도 여러 나라에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그녀의 소원대로 한국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었다. 이민 교회들 역시 복음에 빚진 심정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에 적극 참여하길 기대한다.

(참고: 한국복음주의 역사신학회, 양화진 선교사들의 삶과 선교, 한국기독교 역사연구소, 내한 선교사총람, 한국감리교 인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