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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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 나눔교회 담임)

안나 B. 채핀은 한국 여성을 깨우기 위하여 여성계몽 운동에 앞장섰던 한국의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했다. 나라의 주권을 상실한 조선땅 여성들에게 희망을 주고 아픔을 함께 나누었다. 한국선교 35주년기념 및 회갑을 맞이 했을때 제자들이 잔치를 열겠다고 했을때 자신이 가진 전재산 5천달러를 내놓으며 잔치대신 여성 은퇴 교역자를 위한 안식관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이에 따라 1948년 10월 5일 “채부인 기념 여전도인 안식관”이 개관될만큼 여성의 사역의 열정을 보여준다

그녀는 일찍 18세 때 중생 체험 후 전도자의 사명을 품게 되었고 이미 20세 때 한국 선교를 꿈꾸게 되었다. 그녀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1883년 아이오와 주 매닝(Manning)에서 태어나서 아이오와주립대학(Iowa State University)을 거쳐 존 플레처대학(John Fletcher College)에서 피아노를 공부했다. 1911년 남편 빅터 채핀과(Chaffin, Victor D., 한국이름은 최피득) 결혼후에 낳은 어린딸과 여동생 로사 베어(B. R. Bair) 함께 내한하여 남편의 선교사역을 내조하는 평범한 여인으로 살게 된다.

남편 빅터 채핀 선교사는 남감리교 소속 목회자였지만 내한 직후 북장로교로 옮겨 언더우드 선교사를 도와 새문안 교회에서 동사 목사로 서부 지역과 김포, 고양 등지의 여러 교회를 순회및 시무 했으며 연세대학의 모체인 조선 기독교 대학을 설립하는 일에 실무를 담당했다. 결코 빛나는 자리에 앉지 않았고 예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헌신 하다가 내한 3년만 (당시35세)에 과로로별세하여 현재 양화진에 묻혔다.

남편 사망 이후 안나 채핀 선교사는 특히 한국 여성들의 신학 교육과 농촌 발전을 위한 교육에 매진했다. 1916년부터 감리교의 부인성경학교 교사로서 여성들을 가르쳤고, 1918년에는 앨버슨(Alberson) 원장 후임으로 헌신했다. 1920년부터 미 남북감리교단이 연합하여 설립한 감리교협성여자신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미국에서도 여성 목회자를 인정치 않는 시대에 한국에서 여성목사로 안수를 받아 한국에 평생에 자신을 삶을 바쳤다. 그녀에게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는 농촌 계몽에 헌신한 여성 지도자를 길러낸 것과 여성 절제운동을 펼친 것이다. 농촌계몽 운동은 192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협성신학교의 부교장이던 안나 채핀 선교사는 신학교에서 남녀공학 수업을 실시했고, 농촌문제 연구과에 농촌문제 전문가인 황애덕 교수를 채용하여 농촌계몽 운동에 헌신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 시켰으며 1923년 감리교와 장로교 여선교사를 규합하여 ‘기독교 여자 금주회’라는 모임을 결성하여 처음으로 여성 절제운동을 시작하였다. 1937년대에는 만주로 건너가 만주 신학교를 설립하여 2년여 동안 만주 지역 교역자 양성에도 헌신하는 등 다양한 선교사역을 펼쳤다. 그녀는 남편 사별 12년후에 동역자이며, 사랑하는 여동생 로사 B. 베어(Bair, Blanche Rosa) 선교사 조차 천안 지방에서 여성사회 사업을 위하여 활동 사역을 하다가 뇌질환으로 1938년 3월10일 (당시 5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동생 로사 베어가 꿈꾸던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그녀는 동생의 사역지였던 천안에 파송을 자원하여 베어가 이루지 못한 사역에 한알의 밀알이 되었다. 때로는 일제의 추방을 받아 한국을 떠날수밖에 없었지만 다시 한국에 다시 들어와서 은퇴할 때 까지 한국교회 재건과 여성 교역자 양성을 위해 50년동안 사역을 마치고 1977년 6월, 94세를 일기로 미국에서 소천했다. 그녀의 소원대로 양화진에 있는 남편 곁에 안장 되었으며 그녀의 예수의 삶은 한국 교회을 깨우는 초석이 될것이다.※참고문헌: 100주년기념사업(양화진 외국인선교사 소개), 한국기독교역사, 여성과 한국교회, 기독교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