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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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 나눔교회 담임)

금주 소개되는 마벨 R. 젠소(Genso, Rittgers Mabel)선교사는 한국 문맹퇴치 운동과 한국 교육 선교에 큰영향을 끼친 선교사중 한사람이다. 남편 프레드릭 젠소 역시 ‘한국 전쟁 기간중 가장 큰 두가지 손실중 하나가 존 F. 젠소의 별세이다’라고 한국 선교 역사의 제자 해리로드가 기록했다.그만큼 그는 유능한 선교 사역에 동역자이었음을 알수있다. 마벨 젠소는 남편을 만나기전 1882년 4월 5일 미국 아이오와 주에서 8남매중 7번째로 출생 하였다. 그녀는 디모인 고등학교와 디모인 하이랜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난뒤 무디 성경학교(1907-1908)를 수료했다. 이때 선교사로서의 준비를 갖춘것으로 본다. 이후 아이오와 주 포크 카운티에서 초.중등학교 교사로 봉직 하면서 주일학교 교사로도 활동했다. 1906년 6월 6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선임되어 1908년 11월 27일 내한하여 서울에서 활동 하다가 같은 시기에 한국 선교사로 온 프레드릭 젠소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녀의 본격적인 선교 사역의 출발은 한국에서 언어학을 공부한 뒤 1910년 정신여학교 제7대 교장으로 임명을 받아 부임했으나 몇개월만에 그만두고 아동교육, 심리학 교사로 오랫동안 시무 하다가 다시 1920년 정신 교장 서리로 다시 취임했다. 1941년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학교 교육 이외에도 전도, 성경 연구반을 인도 했으며 더 나은 육아 환경을 만들기 위하여 엄마 클럽을 시작하고 그의 제자 유각경을 통해 YWCA가 설립되고 활동 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으며, 기독교 여성 단체등에서 끊임없이 활동했다. 일제 강압과 한국 전쟁으로 잠시 본국으로 철수 하였다가 1954년 다시 입국하여 대한 기독교 개명 협회 협동 총무로 적극적인  문명퇴치 운동에 힘썼다. 문맹자를 대상으로 한글 교육과 문서 선교를 위해 기독교 연합사업 기관이 1949년 6월에 설립 되었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마벨 선교사가 남긴 글중에 자신의 집에 가정부로 일했던 김씨가 어떻게 성경을 배워 훌륭한 설교자와 전도자가 되었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외국인과 전혀 접촉이 없던 그녀는 연약한 기혼 여성이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강청을 외면하지 않고 마벨 선교사는 그녀를 받아들이며 가족처럼 보내게 된다. 매일 아침마다 있었던 기도회를 통하여 가정부는 변화 되었고 성경 공부를 통하여 말씀에 대한 확신을 얻어 마벨 선교사 사역에 큰 힘이 되었다. 선교사의 가정일을 잘 돌볼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 잘 성장하게 되어 마벨 선교사는 그녀를 잊지 못하고 감사의 소감을 선교 편지로 남겨 놓기도 했다. 그외에도 선교사 부인들이나 독신여성 선교사들이 안식년 기간중 본국에 선교보고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경험한바를 소개 하기도 했다. 선교보고는 선교지의 사람들을 무시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도록 했으며 개인의 필요를 위하여 동정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자신의 영웅 적인것을 소개 하는것이 아니라 선교지의 교회를 대변하는 사람들로 책임감을 가지고 성경 말씀 중심으로 보고하여 선교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마벨 젠소는 1956년 정신학교 강단에서 고별설교를 하고 다음해 1957년 향년 75세로 마국 버지니아주 알링턴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의 유언대로 그의 유해를 양화진묘에 남편곁에 안장 되었다. 젠소 선교사 부부의 묘지 에는 아들 존 R. 젠소(Genso, John Rittgers)가 1911년 한국에서 출생하여, 3살 어린 나이로 1914년 8월30일에 사망하여 묻히게 되었다. 두딸들은 서울에서 출생하여 외국인 학교의 교사로 봉사하며, 하나님의 일에 열중 하다가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들 가족은 조선땅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뼈를 묻은 영광스러운 가문이다.

참고도서 : 양화진의 선교사의 삶, 한국교회사,정신백년사,기독교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