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6

860

김영문 목사(시카고 나눔교회 담임)

최초로 구약 성서를 한국말로 번역한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 선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번역에 중추적 역할을 했던 은인이요 영원히 잊지못할 선교사이다. 대부분 신약 성서를 한글로 번역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출신 존 로스 목사(John Ross, 1842~1915)는 많이 알려졌지만 피터스 목사에 대해서는 무슨일을 했는지를 잘 모르는분이 많다. 알렉산더 피터스는 1871년 12월 30일 러시아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하여 비교적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지만 그가 자라났던 19세기말, 제정 러시아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밝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이었다. 또한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극심했다. 결국 희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를 떠나 1895년 4월 멀고 먼 일본 나가사키에 가서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게 된다. 유대인 본명을 버리고, 그에게 세례를 준 미국 선교사의 이름을 따라 ‘피터스'(Pieters)라고 개명했다. 그때부터 그는 ‘피터스’로서 하나님이 인도하는 새로운 삶의 길을 걸었다. 당시 피터스 청년이 1895년 한국에 오기 전까지 이 땅에는 한국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이 없었다. 당시 한국에는 구약성경을 번역할 인물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피터스는 그 일을 감당하는데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가 1895년 한국에 와서 3년간 한국말을 배운 후 1898년 시편의 일부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출간한 것이 역사상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번역이 된다. 그는 구약성경 개역 평생위원으로 위촉되어 한글성경 개역 작업에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다. 개역 작업은 1938년에 끝이 났고, 그 해에 ‘개역 성경전서’가 출판 되었다. (1956년에는 한글 맞춤법에 맞추고, 문장구조를 손질해서 수정한 ‘개역성경전서’가 출간되었다.) 당시 조선에 있던 선교사들은 성경번역 위원회를 만들고, 피터스를 미국의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1900년부터 3년 동안 피터스는 미국 매코믹 신학교에서 신학을 마치고 1902년 목사 안수를 받아 1904년 9월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당시 신학교에서 같이 신학 수업을 받던 엘리자베스 캠벨(Elizabeth Campbell)을 만나게 되어 결혼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아내 캠벨 여사는 서울 생활이 얼마 되지를 않아 폐결핵에 걸려, 결혼생활 4년도 넘기지 못하고 33세 젊은 나이에 별세 했다.

부인의 죽음이후 피터스 목사는 후일 세브란스 병원에 결핵환자 진료소를 마련했고, 크리스마스 ‘실’운동을 전개하며 가난한 나라의 폐결핵 환자를 지원하는 일에 힘썼다. 그 후 피터스 목사는 세브란스 병원 의료 선교사였던 의사 에바 필드 여사와 재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지만 필드 여사 역시 불치의 병인 암에 걸려, 세브란스 병원서 별세했다. 피터스는 이방 땅에서 아픔과 상처를 한몸에 품고 안고 성경번역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친숙한 찬송가 383장과 75장 가사도 작사했다. 1941년 피터스 목사는 70세가 되어 은퇴할 나이가 되어 성경 번역자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46년 동안 사역을 마치고 한국을 떠나 미국 캘리포니아주 LA근교 선교사 주거 시설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8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묘지는 목사 직함도, 공적도 없이 이름과 출생, 사망 년도만 있었다.

피터스 목사의 구약 성서 번역은 한국 교회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성장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으며 일본 식민지 세력 밑에서 압제 당하는 한민족에게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알게 해 주었다. 구약성경 번역은 우리 민족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다. 잊혀가는 피터스 선교사 삶을 보면서 자기의 동족도 아닌 이방땅 한국에 와서 일평생을 바친 헌신과 열정과 애국은 영원히 기념이 될것이다.(참고문헌 : 박용규의 소논문 ‘알렉산더 피터스’/크리스천 투데이, 한국복음주의 역사학회 ‘양화진 선교사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