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신학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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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들어서 미국 중서부 지역에 포근한 날씨가 연일 계속되면서 지난해말 미국 대부분 지역에 평균
영하 20도 이하의 혹독했던 한파에서 마치 선물을 받은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오늘은 지난 98년 탈북을
하여 한국을 거쳐 2019년에 미국에 왔다가 마치 운명처럼 기독교 신학공부의 길에 접어든 제임스
이씨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북한에서 어릴때부터 18호 정치범 수용소에서 생활을 하는 등 수많은
고생을 했던 제임스 이씨는 지독한 고난과 배고픔을 피해 중국으로 탈북을 하고 한국에 와서는
명지대학교 교수로서 사회적으로 크게 인정받는 위치에 서게 되지만 결국 여러가지 문제 때문에
수십년간의 한국생활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온다. 제임스 이씨의 신학공부는 처음부터 내가 해야지
해서 된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공부를 안하면 안되는 여러조건들이나 환경들이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왔다. 예전에 몰랐던 하나님의 예정, 그리고 교회의 설교를 들으면서 신학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오게 됬다고 말한다.
이씨는 처음 미국에 온후 미국정착을 도와준 기독교 교회의 사택에 머물게 된다. 그후 불과 20여일이
지나서 뜻밖의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교회에서 잠시 냉방기 수리를 돕게 되는데 2층에서 추락을 하여
팔을 크게 다쳤다. 대수술을 해야할 만큰 큰 사고였고, 그 사고로 3개월후에 교회를 떠나려던 계획이
변경되어 계속해서 지금까지 머물다가 교회의 권유로 신학공부를 하게 된다.
제임스씨의 뇌리에서는 어릴때 북한에서 다른 북한사람들 보다도 유별리 고난을 많이 받고 고생했던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아버지의 직장 상사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한밤중에 온가족이 끌려간 평양
인근의 18호 북창 정치범 수용소의 생활은 그야말로 짐승 같은 삶의 연속이었다.
처음 18호 수용소에 들어가자 구경나온 수용소내 아이들의 몰골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란던 기억이
난다. 신발하나 제대로 신은애들이 없고 겨우 신발같은 것을 신은 아이를 보니 폐 타이어 조각에
노끈으로 묶은 임시 신발이었다. 그런 그아이들의 모습이 얼마지나지 않아 제이스 이씨의 모습이
되었다. 부모님과 밑으로 어린 세여동생 앞에는 굶주림과 온갖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임스 이씨
조차도 영양실조로 얼마 않있어 손톱과 발톱이 모두 빠져 버렸었다. 북창 18호 수용소안에서 탄광일을
시작하신 아버지는 잠시 불만을 터뜨렸다가 결국 보위부에 연행이 되어 처형이 되셨다. 어머니가 제발
자식들만은 살려달라고 간절히 애원하고 북한정권에 충성한 결과로 8년만에 수용소를 나오게 된다.
공부를 매우 잘했던 제임스 이씨에게는 북한정권에게 ‘반동’이라는 이유로 대학갈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중국으로 제임스씨는 탈북을 한다. 그리고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와서 공부를
하고 남부럽지 않은 대학교수 직업을 가지고 많은 탈북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한국사회에서도 상당한
지위를 가졌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미국에 와서 사고를 당하고 신학공부를 하면서 전 우주와 세상만물을 만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깊이 알아가는 기회가 온다. 교회에서 처음에 이씨에게 신학공부를 제의
했을때는 자기 같은 사람이 무슨 신학공부냐며 여러차례 거절을 했으나, 이상하리만큼 결국
신학공부의 길로 인도가 되었다고 한다. 제임스씨가 공부하고 있는 신학공부는 이제 몇년만 하면
졸업을 하게 된다. 그러면 교회에서 전도사의 직분을 가지고 기독교 신학을 가르치게 된다.
제임스 씨는 수많은 고생을 하면서 자라왔고 한국에서는 대학교수 생활까지 하게되었지만 길게
본인의 인생의 길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고 제임스 씨는 말한다. 이런
복음이 고향 북한땅에서 제대로 알려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
한미자유연맹 부총재 김성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