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진정한 근대사회의 르네상스 맨

1801

후손 통해 다시 만나는 헤이그 특사 보재 이상설

 

증손주들 “할아버지 덕에 가난했지만 떳떳했다”

해외 독립운동 기초 닦고 1917년 러시아서 순국

100주기 맞아 진천 생가 등서 올봄 대규모 기념식

 

 

이상설 선생 동생 이상익의 첫째아들 이관희씨 가족들. (왼쪽 뒷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재풍, 이관희, 김진배, 이재경, 이재흥, 이재은, 이재열, 이재승.

 

110년전 헤이그 특사 정사로 파견되어 10년을 이국땅에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산화한  보재 이상설. 그가 올해 순국 100주년을 맞아 재조명되고 있다. 그의 후손들이 일리노이와 미시간 등 미국땅에서 살고 있다. 이들로부터 독립운동의 초석을 다진 이상설 선생의 정신과 업적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하는 것은 가슴 뛰는 일이다.

유언대로 그의 모든 흔적들은 러시아 아무르 강변에 뿌려졌다. 하지만 그의 조국을 위한 희생과 헌신은 최근 여러 학자들을 통해 발굴된 역사적 문헌 및 자료들을 통해 지금에 전해지고 있다. 그의  후손들도 그의 발자취 중 하나다.

보재 이상설 선생은 아들 정희와 딸 가희를 뒀고 정희는 삼형제 재홍, 재철, 재준을, 가희는 현원씨를 뒀다. 이상설의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 이상익은 관희, 양희, 완희를 두고 관희씨의 6남매 재흥, (고)재열, 재경, 재풍, 재승, 재은을 뒀다. 이상익의 첫째 아들 관희씨는 생존에 보재 이상설 선생에 관해 국민들에게 현양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해 여러 일들을 이뤘고, 그의 아버지가 타계하고 그의 육남매 중 재승씨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지금까지 자료를 모으며 이상설 선생의 흔적을 찾아나가고 있다. 현재 6남매 중 고인이 된 재열을 제외한 5남매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기자는 이재승 원자력공학박사(미시간대 교수)와 일리노이 디케이터의 이재풍 피부과 전문의로부터 후손으로서 그들이 전해듣고, 받은 이상설 선생의 흔적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 가난했지만 떳떳한 우리 집안

이재승 교수(이하 이재승): “우리 6남매가 어릴때는 가정형편이 굉장히 어려웠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부모님은 교육의 끈을 붙잡고 모두 열심히 공부해서 전문의 자격 의사 3명과 화학, 영양학, 원자력공화학 박사 3명을 키워내셨다. 이 모든것은 부모님의 공덕이 많지만 독립운동가이자 학자로서 열심히 사셨던 할아버지들(이상설, 이상익)을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하며 살아온 덕분이라 생각한다. 보재 이상설 선생이 마지막 대한제국 직위가 의정부 참찬(부총리급)이었기에 명동 백병원 근처에 99간짜리 집도 있었는데(당시 임금이 대신들에게 하사한 집 중 제일 크게 지을 수 있는 규모가 99간) 이것을 후세에 남겨주었으면 잘 살았을 텐데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이유는 보재 선생이 외국 망명 직전에 전 재산을 다 팔아서 중국 용정에 민족학교 서전서숙을 짓고 군사기지 창설 등 독립운동을 위해 모든 기금을 쓰셨다. 비록 학교 등록금도 내주지 못하실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지만 우리는 집안에서는 떳떳하고 자랑스러워하며 살았다. 아버지(이관희)는 임시정부의 총무과장으로 일하시며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KBS가 국영방송이 되면서 첫 중앙방송국장을 지내시기도 했다. 생전에 보재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위해 노력하시며 독립 운동에 있어서 마지막에 관계하시면서 동시에 자녀들 교육을 위해 열심히 일하신 분이다.”

1894년 실시된 조선 마지막 과거인 갑오문과에 급제한 이상설의 당시 과거시권(지어지선론)

 

■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

이재승: “할아버지 이상익은 3살에 부모를 잃고 형인 이상설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할아버지(이상익)은 근대 수학 교과서를 집필하며 산술 전문학교를 세우는 등 보재 선생을 이어 근대 교육에 이바지한 인물이었다. 보재 선생이 한국을 1906년에 떠났을 때 우리 아버지(이관희/이상익의 첫째 아들) 나이가 6-7세 정도였기에 보재 선생 떠날때 뵈었다고 했다. 그 이후 해외에서 11년간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시는 소식을 가족들을 통해 많이 듣게 되신 것이다. 그 모든 내용들을 기록하고 기억하고 있는 일화들을 우리들에게 자주 이야기 해주셨다. 당시에 “내가 조국 광복을 못보니 유품을 남기지 말고 다 없애라” 유언해 동료들이 보재 선생이 남기신 자료나 책들을 모두 불태워 버린 것으로 알고있다. 그로 인해 남은 자료가 별로 없어 아버지가 보재 선생의 전기문 등 책들을 발간하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자료를 모으는데 미국으로 유학와서도 계속 도와드렸다. 현재 나는 육남매 중에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50년이 지나도록 여러 자료들을 모으고 있다. 보재 선생이 남긴 문헌중에 수학, 과학과 관련된 것들이 많았고 한문으로 쓰여진 이 자료들을 한학자를 통해 번역해 학술지에 정식으로 논문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 논문을 통해 알 수 있던 것은 보재 선생이 근대 한국 수학, 과학(화학, 식물학, 물리학) 등에서 얼마나 상당한 수준이었는지를 나타냈고 후세 교육을 위해 쓰신 것을 알 수 있었다. 최근에는 국제법, 경제법을 집필한 문헌이 발견되어 전공자들이 논문을 작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 ‘천재’라 불리는 비범한 인물

25세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갑오문과(1894년)에 급제하고, 27세에 성균관 교수 겸 관장과 한성사범학교 교관 역임했다. 33살이 되는 1905년엔 고종황제로부터 의정부참찬에 임명 받았다. 전통 학문을 포함해 근대학문인 수학, 과학, 경제, 법률, 정치, 철학, 종교 등 모든 학문에 관심을 갖고 독학으로 공부했고 그는 현재 여러분야에서 ‘대가’, ‘아버지’라 불리고 있다.

이재풍 의사(이하 이재풍):“아버지(이관희)에게 듣기로 보재 선생은 화학, 물리, 수학을 잘하시는 천재라고 하셨다. 항상 아버지는 우리 육남매에게 우리는 보재 선생에 비하면 바보천치도 안되니 더 열심히 해야한다는 말을 백번도 넘게 이야기 하셨다. 그만큼 보재 선생이 굉장히 똑똑하셨고 최근 발견된 자료나 소식들을 접하면 접 할수록 기가 막힌 것들이 많다는 것이 많아 우리 또한 놀란다.”

이재승:“독립운동가로서 알려지기도 했지만 여러 학자들의 연구 한 것을 보니 독립 운동가로서 뿐만아니라 수학, 물리, 화학, 경제, 정치 등 여러방면에서 저술도 하시고 교육적으로 많은 부분에 기여 하셨다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었다. 한국 수학회에서는 한국 근대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등의 이야기도 전해져오고 있다. 또한 망명정부로 첫 정부는 대한 광복군정부가 있었는데 첫 광복군 정부의 대통령 역할을 하셨고 독립운동가로서 뿐만아니라 한국 근대 과학 ,수학 등에 있어서 ‘수리’, ‘산술신서’, ‘화학계몽초’, ‘백승호초’ 등의 책들은 일본이 침략하기 이전부터 당대에 근대학문을 수용하고 연구하는데 큰 역할을 하셨다는 역사의 증거들이다.”

이재승: “수학을 배우다보면 중세기 르네상스시대에 다빈치, 미켈란제로 등과 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보재 선생이 한국의 19세기 말 20세기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와 같은 르네상스 맨이 아니었나 생각이 된다. 한국의 근대역사에서 국가적 차원에 있어서 이러한 분이 있다는 것은 후손으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닌가 싶다. 20년쯤 전에 한국사의 천재들(김병기, 신정일, 이덕일 저)이란 책에서 13명을 뽑았는데 그 중 보재 선생이 독립운동가 이외에 다른 부분도 다뤘다. 아무래도 보재 선생 관련 논문들이 발표 전이라 어느 정도의 가치 있는 학자였는지 깊이는 못 다뤘지만 근대사회에서 신구학문으로 당대 시대적 사건에 맞선 그의 업적은 후손의 입장으로서 뿐만아니라 국가적인 면에서 교육적으로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느낄 수 있다 생각한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 3인의 특사단에 내린 고종 친서 위임장(신임장). 위임장에는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은 세계 각국이 인정한 바이고 각국과 조약을 체결했으니 열국 회의에 사절을 파견하는 것이 도리이다. 1905년 11월 18일 일본이 공법(公法)을 위반하여 외교대권을 강탈하여 열국과의 우의를 단절시켜 놓았다. 특사단은 헤이그 평화회의에 가서 우리의 고난을 피력하고 외교대권을 회복하기 바란다”라고 적혀 있다.

 

■ 순국 100주년을 기념하다

1907년 광무황제(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부당함을 알리는 임무를 맡은 그는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쉬지 않고 유럽과 미국 등에서 한인들을 단결시키며 독립운동을 펼쳐나갔으나 건강을 돌보지 못했던 이 선생은1917년 3월 47세로 생을 마감한다.

일평생 조국을 위해 일한 이상설 선생을 기려 그의 고향인 충북 진천에서 순국 100년을 추모하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으며, 오는 4월 21~22일간 대규모 기념식을 개최한다. 이 선생의 생가가 위치한 진천읍 산척리 일대에 87억 7천만원을 들여 ‘보재 이상설 기념관’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국비와 지방비로 건립이 진행되며 이중 20%는 범국민 모금운동을 통해 마련될 예정이다.

이재승: “이상설 기념사업회 리더 역할을 맡고 계신 이상훈 박사님은 나의 고등학교 화학선생님이며 순국 100주년 기념식을 위해 충청북도 도지사, 진천군수 등을 비롯해 수 많은 분들이 도와주고 이 사업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100주년을 맞은 올해는 재경누님과 재풍 형님과 함께 참석할 계획을 하고 있다. 4월 중 미시간 대학 강의를 마치자마자 한국으로 가서 기념식에 참석하고, 4~6월동안 강의를 진행하는 등 바쁜 스케줄을 보낼 것 같다. 그럼에도 이번 기념식 참석은 우리들에게 감회가 새롭고 민족을 사랑했던 보재 선생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 되리라 생각된다. 또한 보재 선생의 직계 손자 3명이 있는데 한국전쟁때 행방불명, 사망한 것으로 알고있고 유일한 손녀 이현원씨가 생존해 있다고 알고 있다. 나와는 6-8촌되는것 같은데 지금까지 만나본적은 없는데 이번 기념식에서 만나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재풍: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위해 한국에 갈 계획을 하고있다. 매년 동생(이재승)이 대표로 갔는데 이번에 누나(이재경)도 함께 해서 처음 가보게 됐다. 설레이고 기대된다. 꼭 가서 할아버지의 뜻을 좀 더 마음 깊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 보재가 남긴 민족사랑과 기념관

이재승: “일본사람들은 우리를 37년간 식민지로 지배하며 나쁜짓을 해놓고 자신들이 아니었음 한국은 (근대학문 으로부터) 깨우치지 못하고 미개인으로 살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1965년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버클리 대학에서 원자력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첫 학기 강의를 듣던 중  저명한 동양학자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가 당시에 일본의 주장처럼 일본이 한국을 다 깨우쳐준것이라 이야기 하더라. 당시에 그것을 듣고 분이 나서 항의했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현재 보재 이상설 선생의 기념관 건립을 위해 충북 진천군에서 노력하고 있고 이는 내년쯤 완공을 예정하고 있다. 기념관의 일부는 범 국민모금운동을 펼쳐 전개하고 있다는 소식도 접했다. 기념관이 아직은 미완공으로 기후 컨트롤러 등이 보완되야하는데 기념관이 제대로 갖춰지면 현재 내가 보관하고있는 과거시권(이상설 선생이 마지막 과거인 갑오문과에 급제 한 당시의 시험지) 원본을 기증 하려고한다. 이는 120cm X 100cm 정도로 한지 앞뒤로 기록한 시권은 가보로 갖고있다.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사진들도 많고 여러가지 있지만 그중 복건(돌을 맞은 사내아이에게 입히는 두루마기)도 있다. 이는 고종황제로부터 보재선생이 하사받은 것으로 보재 선생을 통해 우리 집으로 내려와 6남매중 3형제 돌사진은 다 그 복건을 입고 돌사진을 찍었다.”

■ 3.1운동에 전하고 싶은 말

이재풍 : “미국에 와서 살게된 지 50년이 지나가는데 한국에서 일어난 좋은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반갑고 기쁜지 모른다. 잊혀지지도 않고 잊을 수 도 없는 이유는 나는 한국사람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지키기위해 증조부님의 재산, 인생, 생명을 바쳤다. 수 많은 독립운동가 선조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이루고 지금의 민주주의를 이뤄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애국심을 갖고 애국자가 되어야 한다.

한국사람은 축복 많이 받았다. 현재 밥 먹기 힘든 사람이 없지 않느냐. 성경말씀에 많은 것을 받은 사람에게는 받은 것을 비워갔다는 말이 있는데 많은 것을 받았으니 많은 것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현재 미국에 와서 환자들을 도와주고 있는 것은 비록 작은 방법이지만 열심히 섬기려고 한다. 한국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한다. 자신만을 위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나 또한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이재승: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을 못했지만 사방을 다니며 일본이 나쁜 짓 하는 것을 세계에 선포하며 밀사 3명이서 전 세계에 한국 민족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렸다. 3.1운동 당시 독립을 이루진 못했지만 33인 을 비롯해 수 많은 이들을 통해 전 세계에 한민족이 살아있다는 것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였고 우리 민족으로서는 근대사에서 중요한 계기가 됐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당시에 출생도 못했지만 고등학생일 때는 독립선언문을 다 외우면 그것이 그렇게 자랑스럽고 긍지를 가질 수 있었는지 모른다. 3.1운동 정신을 생각하며 현재 한국은 좀 더 단합하고 좀 더 정직하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한국에 가게되면 깨끗하지 못한 거래나 관계들에 대해 듣곤 한다. 정치 뿐만아니라 기업, 학술관계등에서도 마찬가지다. 좀 더 정직하게 사는 사회가 됐음 좋겠다.”<홍다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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