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장익경의 대한민국 리더와의 산책 시리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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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한인 정치의 뿌리 김창준 전 미 연방하원의원과의 만남’

‘당선확률 5퍼센트의 기적을 이룬 동양의 낯선 이방인 김창준’…그는 그렇게 미국 한인 정치의 뿌리가 되었다

‘당선확률 5퍼센트의 기적을 이룬 동양의 낯선 이방인 김창준’…그는 그렇게 미국 한인 정치의 뿌리가 되었다

“여러분은 태어나면서 부터 자연스럽게 미국의 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미국 시민권을 따기 위해서 10년을 밤 낮 가리지 않고 공부하고 일하고 노력해 왔습니다. 얼마전 시민권을 제 손에 받아들고 저는 한 없이 울었습니다. 과연 이 곳에 저와 경쟁하는 후보들중에 누가 더 미국과 세계의 발전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이 연설은 1992년 캘리포니아주 제41지구 연방 하원의원 선거 유세에서 준비한 연설문을 찢어버리고 김창준 전 의원이 시민들에게 당당한 한국인으로써 유권자들에게 영혼의 메시지를 전달한 내용이다.

이짧은 연설이 그를 대한민국 최초로 미 연방하원의원을 만든 것이다.

동양인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백인사회 캘리포니아주 선거구. 이당시 당선 유력인물인 하원의원 지역정치 베테랑 척 베이더가 70%의 지지로 1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짐 레이시가 20%로 2위, 김창준 후보는 5%에 불과한 3위에 머물러 있었다.

여론조사에서 2위를 달리던 레이시는 김창준 후보는 아예 안중에도 없이 오직 1위인 베이더 주 하원의원만을 집중 공략해 서로 인신공격을 일삼고 있었다.

김창준 후보는 이런 틈을 타 위와 같은 마음에 호소하는 진정어린 연설로 역전에 성공한다. 투표일 3주전 신문이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는 김창준 1위.

두 사람은 허둥지둥 서로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김창준 후보를 주 목표로 공략했지만 돌아서기 시작한 민심을 돌리기엔 이미 늦은 상태, 드디어 역사적인 순간이 탄생한 것이다.

김창준 당선.

이에 본지는 미국 한인 정치의 뿌리를 만든 김창준 전 미 연방하원의원을 만나 본다 <편집자주>

Q1. 미국으로 가기 전 의원님의 젊은 시절이 궁금 합니다.

A. 저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고 노는 걸 좋아하는 젊은 학생이었습니다. 대학때는 명동에 춤을 추러 다니기도 했고 사교성도 좋아서 사람들과 금방 친해지고 늘 긍정적인 사고를 지녔었지요. 1950년대 우리의 시대상은 전쟁과 가난으로 얼룩져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게 버거울 정도로 힘든 시기였습니다. 아버님이 사업을 하셔서 저는 주위 친구들에 비해 좀 나은 형편일 뿐, 저 역시도 밥 한 끼 거르지 않으면 다행이던 시대에 살던 갑남을녀(甲男乙女)에 불과한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자 친구들이 절(寺)에 들어가 고시 공부한다고 야단인데, 저만 이대로 있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1살 때 미군 장교와 우연히 알고 지내며 그에게서 영어를 배웠고 저는 그에게 한글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때부터 막연히 미국유학을 꿈꾸게 되었고, 23살 되던 해에 그 꿈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Q2. 1960년대 미국으로 건너간 뒤 낯선 땅에서 정착하기가 힘드셨을텐데요. 미국 도착후 며칠 안되서 이불속에서 많이 우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떠셨나요?

A. 미국 캘리포니아의 채피대학(Chaffey College) 입학허가서를 들고 찾은 미국은 낯설기 그지없었습니다. 미국에서 첫 발을 내디뎠을 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만만하게 한국을 떠나왔지만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도착한 뒤 일주일만에 갖고 있던 돈이 다 떨어졌고 닥치는대로 일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캘리포니아 단칸방에 살면서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식당에서 밤 늦도록 일하며 서툰 영어에, 모든게 색다른 이역만리에서 고독과 향수병으로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괜히 왔구나 하는 생각으로 고국에 두고 온 가족과 친구들을 매일밤 그리워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께는 “제 걱정은 말고 두 분이 행복하게 사십시오” 라고 말씀 드리고 비장한 각오로 여기까지 왔는데 성공하기 전에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고 제 자신을 다독였습니다.

아침엔 신문배달, 밤에는 식당 일을 하면서도 저는 성공하기 위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절을 보내며 점차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법은 배웠습니다. 노력하는 자에게 기회가 찾아온다는 말처럼, 치열하게 살던 제게도 좋은 인연이 찾아왔습니다. 온타리오시에 있는 지역신문사 사장이 아침에는 학교에 가고 저녁에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어서 그때 배달 책임자 일을 맡게되면서 안정적으로 대학을 졸업할 수 있게 되었고 그때서야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기게 됐습니다.

Q3. 미국에서 정치인이 되기 전에 기업인이셨다고 들었습니다.

A. 대학을 졸업하고 몇몇 설계회사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미국까지 와서 이렇게 남의 밑에서만 일하며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맨주먹으로 와서 잃을게 뭐가 있느냐 하는 결심과 열정 하나로 1978년에 제가 직접 ‘제이킴엔지니어링’ 이라는 회사를 차렸고, 제가 가진 기술력과 열정을 내세워 미 연방정부 중소기업청 (SBA)의 지원을 받아 사업을 꾸려나갔습니다. 그 회사를 미국 500대 엔지니어링 기업 중 하나로 선정될 만큼 탄탄한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200불을 손에 쥐고 낯선 땅인 미국으로 건너와 힘들때마다 더욱 더 열심히 살았던 제가 이제 성공한 이민자로서 지역사회에서 자리를 잡게 된 것이었습니다.

Q4. 정치인으로서의 김창준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A. 회사가 성장하면서 돈은 많이 벌었지만 돈보다는 역경을 이겨낸 ‘성공한 한인 1세대’라는 뿌듯함이 더 컸습니다. 그때쯤 저는 국가의 실질적인 제도개선을 위해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것은 ‘정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고민의 시간 끝에 정치에 뛰어들게 되었고 제가 살던 캘리포니아 다이아몬드바 시에서 시의원을 거쳐 1991년에는 시장을 지냈습니다. 이후 미 정치의 중앙무대인 연방하원의원에 도전을 하여 1992년 공화당 소속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되어 3선 연임에 성공을 했습니다. 국회의원 선거 당시 여러명이 출마했는데, 저의 상대주자는 주 상원의원 출신 후보였고 저보다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저는 ’정치만 하던 사람들이 지금까지 무엇을 이루었는가‘ 라며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저는 성공한 기업인이자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온 이민자로서 그 어떤 후보보다 열정적이고 능력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고 결국 이것이 통했습니다. 어렵사리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됐지만, 유색인종이 백색정당인 공화당의 의원으로 지내는 것은 결코 녹록치 않았습니다. 민주당의 경우 아시아계 2세나 흑인들이 좀 있었지만, 공화당에서 아시아계는 저 혼자였습니다.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을때라 백인정당에 유색인종이 들어오니 금방 타깃이 됐고, 열심히 지역구 활동을 한 덕택에 압도적으로 3선을 했지만, 그만큼 감수해야 할 고통도 많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를 가장 힘들게한 결정은 ‘정치’를 시작한것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정치를 택한 것에 대한 후회보다는 정치를 하는 동안 이루지 못한 일들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크다는게 사실입니다. 그 당시에는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때였지만 제 뒤를 이어 연방의원이 된 후배들은 제가 겪은 불이익과 고난을 훌쩍 뛰어넘어 한국인의 저력을 널리 펼쳐줬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최초의 한국계 미 연방하원의원을 지낸 저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Q5. 귀국하신 이후에 한국에서 하시는 활동은 어떤 부분에 역점을 두고 계시는지요?

A. 3선의 미 연방하원의원을 지낸 경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저의 경험을 조국의 젊은이들에게 돌려주자.’ 라는 생각이 들자 새로운 꿈이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부터 지금까지 10년간 운영해온 김창준아카데미가 그 꿈의 실현입니다. 처음에는 한 기수에 20여명의 원우들로 시작했던 작은 아카데미가 지금은 매년 80명이 넘는 수강생이 있고, 1000여명의 졸업생들을 배출했고, 이미 그분들이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카데미 졸업생 중에는 현직 국회의원 몇분과 은행장, 기업 사장단 등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습니다.

또한 아카데미를 10년간 운영하면서 직접 한국의 정치, 경제계와 소통을 하게되었고, 미국이라는 나라와 어떻게 교류를 열어 나가야 하는지, 미국의 시스템은 우리와 얼마나 어떻게 다른건지 잘 알지 못해서 이미 미국에 진출해있는 기업들마저도 어려움에 처하는 걸 보고 안타까울 때가 참 많았습니다. 이에 한국과 미국이 활발한 교류가 이어질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2017년부터는 한국 출신 국회의원으로 유일하게 제가 속해있는 FMC (Former Members of Congress)의 대규모 Annual행사 (Statesmanship Awards Dinner Sponsorship) 자리에 여러 한국 기업인들을 초청하여 그곳에서 미국의 전 현직 국회의원들과 정부관료들, 그리고 각국의 기업인들을 만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2019년부터는 매년 FMC 소속 전직 상하원의원들과 가족 포함해 15명 정도로 구성된 방한단을 정식으로 한국에 초청하여 국무총리, 외교부, 지자체, 대기업 등과의 면담과 간담회 등을 갖고, 실리가 있는 민간외교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2020년에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그해의 초청을 멈추긴 했지만 2019년에 1차, 2021년에 2차, 2022년에 3차 방한단이 한국을 방문하여 각각 11일 정도를 한국에 머물며 기업인들과도 만나 경제, 통상 및 정책에 대해 논의하고, 다양한 6.25관련 추도식 참석, 격전지 방문 및 해당 지자체 브리핑 등을 통해 한미간의 강력한 동맹의 필요성을 재확인하는 중요한 자리를 갖기도 했습니다. 이 방한단 행사를 통해 한국을 다녀간 미국 연방의원들은 모두 친한파가 되어 현재에도 한국과 관련된 일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최근 미국의 IRA법안 통과에 따른 전기차 보조금 문제가 발생하자 한국기업들의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FMC의 전현직 의원들이 행정부서에 보낼 공식서한을 작성하고 이와 관련된 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한국인 최초의 미국 연방하원의원이라는 사실을 늘 견지하면서 이렇게 실질적인 효과가 있는 한미 양국의 교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한미 동맹의 강화와 한국의 건실하고 다양한 외교라인을 만드는데 힘을 보태기 위한 활동도 이어나갈 것입니다.

Q6. 해외의 동포들에게 인사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지금은 제가 미국으로 유학갔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한국이 큰 발전을 이루었고, 해외에서 동포들의 활약상으로 한국의 위상이 아주 높아졌지만, 문화와 역사가 전혀 다른 외국에서 산다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역경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아무리 좋은 일만 하면서 살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저도 물론 역경의 터널을 건넜습니다. 그런 가운데 나름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터특한 제 비법의 키워드는 ‘내일’과 ‘희망’입니다. ‘내일에 희망을 걸고 살자’라는 신념, 이것으로 제가 어려움을 이겨냈듯이, 이 믿음이 여러분들을 일으켜 세우고 앞으로 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한국에 대한 좋은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저희 동포들은 자부심을 갖게 된다는 것을 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때 우리 해외동포들은 그 누구보다 정직하고 열심히 살고 있으며, 모두가 애국자들입니다. 그리고 가끔씩 터지는 슬픈 고국소식에 가슴 아프하기도 합니다. 모국이 잘 살아야 해외에서 거주하는 동포들은 자신감을 갖고 이민생활에서의 온갖 역경을 잘 헤쳐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고국인 한국이 이미 세계 Top 10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가 있지만, 저는 앞으로 우리의 국력과 국제적 위상이 더욱더 발전할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고, 발전되는 고국을 보고 해외동포들이 더욱 힘을 내어 각자 생활의 터전에서 국위선양을 해준다면 이것이 한국의 발전에 다시 이바지하게 되는거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카고 한국일보 장익경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