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31] 호레이스 H.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원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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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나눔교회 담임)

언더우드 가계는 4대에 걸쳐 119년동안 한국을 사랑하고 헌신한 가문이다. 지인들에게 보낸 서신에 보면 “한국의 어둠, 속박, 우울로부터 한국의 빛, 꿈, 소망을 이루는 데 일조하고 싶다”는 내용이 한국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 했는지를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와 6.25를 거치는 민족 수난의 소용돌이 속에 아픔을 동참하는 언더우드 가문이 흘린 피와 땀이 스며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몸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 할 정도로 이미 정신적으로 이미 한국인이 되었다. 그의 가문은 한국의 교회, 시민운동뿐 아니라 한미관계 발전에도 두드러진 공적을 남겼다.

특히 언더우드 2세로 불리는 호레이스 H. 언더우드<사진>는 서울 정동에서 출생하여 “서울에 경사”라는 의미를 가진 원한경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문화와 언어를 배우면서 한국 어린이들과 함께 성장했다. 부친의 모교였던 뉴욕 대학에서 교육학과와 심리학을 전공한 뒤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연희 전문학교 교수로 교육학, 심리학을 가르치면서 한국 최초로 사회학 강의를 개설하게 되었다. 그는 근대 교육학적 이론과 방법으로 연구한 한국 최초의 교육사이다. 백낙준 박사는 호레이스 언더우드를 (원한경) 우리민족을 끝까지 사랑한 선교사요, 교육가요, 애국자라고 표현했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잔인한 만행과 폭력을 휘두른 일제의 잔악함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알리는데 앞장섰다. 제암리 교회 방화, 학살사건을 직접 조사하고 양민들의 학살과 참상들을 카메라에 담아서 세계 언론과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를 통해 알려져 일제 만행을 규탄하는 일에 최선봉에 서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한국이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통일되기를 가장 소원했던 애국애족의 사람이었다. 미.일간의 감정이 악화 되면서 일제가 선교사들을 가혹한 탄압을 가하자 미국 정부는 미국인 안전을 위해 본국으로 소환했다. 그러나 원한경 선교사는 당시에 연희 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제작 하면서 본국의 훈령을 거부하고 끝까지 한국민족과 생사를 같이했고 결국 일제에 의해 가족들이 체포되어 6개월 수용생활을 하게 되었다.

미.일간에 민간인 포로 교환 협정에 따라 포로에서 풀려나고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해방후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선교사로서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1949년 3월에 부인 에델 여사가  공산당 학생 간부들에 의해 암살을 당하는 슬픔의 고통을 겪게 된다. 범인이 체포가 되어 재판에 넘겨졌을 때 그는 “원수를 사랑하라” 주님 말씀대로 범인들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정부에 청원했다.

6·25전쟁이 반발할때 대부분의 한국 주재 선교사들이 철수 했지만 원한경 선교사는 한국의 위기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다. 원한경의 아들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당시 자진해서 6·25전쟁에 참전한 언더우드가의 이야기는 미국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그는 한국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부친 언더우드 뒤를이어 한국에 대한 자부심과 한국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많은 논문을 통하여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데 혼신을 다 하다가 1951년 2월 20일 60세에 한국전쟁이 한창일때 미군 민간 고문단으로 활동 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참고문헌: 언더우드 목사의 선교편지, 원한경의 삶과 교육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