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32] 릴리안 E.B. 앤더슨(Lillian Elizabeth Beede And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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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나눔교회 담임)

릴리안 앤더슨 (Lillian Beede) 선교사는 1892년 8월15일 네브래스카 주 세든, 퀘이커 교도 가정에서 출생 했으며,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했다, 옥시덴탈 대학과 캘리포니아 대학교를 졸업했다. 선교의 꿈을 갖게된 동기가 어린 시절 영어를 배우기 위해 미국에 온 일본 청년들과 교류하면서 동양 선교의 비젼을 갖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미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에 일본 선교사로 지원했다. 그러나 바울을 마게도냐로 인도 하듯이 하나님은 릴리안 앤더슨을 한국에 계획 하셔서 1917년 9월 27일 한국 선교사로 결정된 남편 앤더슨(안대선)과 결혼하여 함께 한국으로 파송받아 내한하게 되었다.

릴리안 부부는 선교의 출발은 선임 선교사 후임으로 안동에 이주하여 농어촌 지역을 순회하여 젊은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며 교회사역, 교육사역등 선교사역에 헌신을 다했다. 특히 남편 안대선 선교사는 1921년 2월 5일 한국에서 최초로 기독청년 면려회를 안동 지방에 설립하여 실의에 빠져 있던 청년들에게 복음과 희망을 전했다. 처음에 이 모임은 교회사업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후에 금주, 금연운동, 물산장려운동, 문명퇴치운동, 농촌사업 등 범국민적 운동으로 번져갔다.

이 모임은 기독청년들이 기독교 사랑의 계명을 이웃 섬김으로 실천하는 신앙운동과 절제 운동으로 1923년 6월 13일 경기 충청노회에 속한 각 교회에 청년 면려회를 조직 하기로 결의하여 전국에 확산하게 되었다. 그후 1924년 12월 2일 서울에서 “기독교 청년 면려회 조선 연합회” 창립총회가 개최되고 그는 총무로 피선되어 10년 동안 만국 조선 기독청년 면려회 초대 총무로 활동했다. 청년 면려회는 1934년 전국에 1,067개소, 지방연합회 26개소, 총 회원 31,394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면려회 출발점은 1881년 미국 포틀랜드(Portland)에 있는 윌리스톤 회중교회의 목사 클라크(Francis Edward Clark)가 청년들을 위한 성경공부와 기도 모임을 가지면서 미국 여러 지역으로 확산된 청년 신앙 운동으로 19세기 후반에 한국에 입국한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면려회를 소개했다. 그러나 신앙 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하다가 안대선(Wallis Anderson) 선교사에 의해 면려회가 조직되고 활성화 되었다.

신앙 운동은 후에 남 선교회 전국 연합회로 개명되어 농촌교회 전도운동에 힘을 쏟게되었다.     특히 남편 안대선 선교사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고 있을때 청년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었다. 릴리안은 남편이 안동에 주재하는 동안 안동에 여성 성경학원을 설립하고 교장으로 봉사 했으며 서울 선교부에서 여자 성경반을 지도하고 정신 여학교 교사로 17년동안 활동했다.

그녀는 한국인들에게 ‘절대 화내지 않는 부인’이라고 알려질 만큼 따뜻하고 사랑이 많은 여성이었다. 앤더슨 선교사 부부는 네 딸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1919년 6월 12일 출생한 도로시는 1920년 1월 25일 어린 나이로 안동에서 사망하는 아픔도 있었다. 릴리안은 남편을 내조하며 하나님 주신 고귀한 선교 사명을 위해 전도, 교육, 계몽 사업에 전념하다가 1934년 11월 추수감사절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녀의 아름다움 헌신은 묘비에도 선교의 열정을 암시하고 있다. “그가 오실 때까지(Till He Comes)”.(참고문헌: 한국민족 문화 대백과사전, 한국기독교 면려 운동사, 기독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