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33] 찰스 A. 사우어(Charles August Sau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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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나눔교회 담임)

사우어 선교사는 교육자, 역사가, 목회자, 행정가로 아름다운 영향을 준 선교사 중에 선교사이다. 특히 한국전쟁 전후로 복구 사업을 위하여 미국에서 모금 활동에 큰 공헌을 하였다. 찰스 사우어는 (Charles August Sauer) 1891년 6월27일 오하이오 주 파울스빙에서 출생하여 웨슬리언 대학교에서 성서교육을 전공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정훈 장교로 근무한 뒤 마거리트 서틀즈와 결혼하게 되고, 한국에서 활동한 노블 (W.A.Noble) 선교사의 권유로 결단하게 된다.

1921년 9월1일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첫 선교지, 평북 영변 숭덕학교에서 교장을 역임하며 비신자들까지 인정을 받는 아름다운 학교 위상을 세우게 되었다. 학생들은 중등과정 47명, 고등과정 42명이 교육을 받고, 더 나은 교육을 위하여 건물과 시설 건축을 계획하며 건축 모금액이 3만엔을 정했는데 짧은 시간안에 모금이 달성하게 된다. 새로운 교사와 내부적 변화로 학교 발전이 질적으로 크게 향상 되었다.

미국에서 1차 안식년을 갖고 귀환한 다음에는 충남 공주읍 중,고등학교(현 영명학교)에서 3년 교육에 종사하게 된다. 당시 책임자였던 윌리엄스는 미래를 내다보며 영면학교를 실천적인 학문을 강조하고, 과학 기술을 도입하여 실업학교로 전환했다. 중요한 이 시기에 사우어를 실업 교육을 담당할 교육 선교사로 파송 받게 되었다.

사우어는 그곳에서 윌리엄스를 도와서 한국 농촌을 살리고 지역 복음화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사역에 임하게 된다. 선교활동 뿐만 아니라 계몽운동과 농촌에 살고있는 농민의 소득을 향상 하는일에도 직접 참여 하였다. 당시 국제적으로 중,일 전쟁과 2차 세계대전이 시작 되면서 한국 선교사와 일본의 관계가 악화 되었다. 선교사들은 일본의 신사참배를 거부 하면서 일본의 압박이 심해지고 결국 미국 선교부에서는 최소 인원을 제외하고 귀환조치 명령이 내렸다. 모든 감리교 선교사들은 책임자 5인을 남기고 1940년 11월 미국에서 특별 송환선을 보내와 219명이 떠났다.

그때 한국에 남아있던 5인중에 한명이 사우어 선교사이다. 일본 제국의 압력에 남아 있는자도  다 철수하게 되었다. 사우어는 미국에 머물면서도 다시 한국에 돌아갈 기회를 기다리며, 오하이오주에서 있는 서부 연합 감리교회에서 목회 하였다. 해방이 되면서 1946년 11월에 사우어는 앤더슨, 브래넌, 아멘트와 함께 내한 하였지만 해방과 더불어 한국내에는 일제의 잔재 청산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었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이 보여준 친일 행적에 대하여 회개와 반성없이 변명으로 교단내 분열과 싸움은 지속 되었다.

귀환한 선교사들은 내분을 안따깝게 생각하면서 정치적 중립과 양측의 화해를 시도하기도 했다. 당시 나라의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각 교단 4개 선교부 대표들이 모여서 기독교 연합 봉사회 설립을 추진하게 되는데 감리교 대표로 사우어 선교사가 막중한 책임을 맡아 활동하게 된다.  한국 전쟁후 복구를 위하여 감리교 해외 구제 위원회를 통해 구호 물자를 원조를 받는데 박차를 가하였다. 기금 목표액 100만 달러를 넘어선 160만 달러를 모금하였고 전쟁 미망인을 위해 모자원 사업을 시행하여 전국에 모자원을 설립하여 운영 하였다. 그외 고아원 양로원 사업을 위해 50여 기관을 지원 하였다. 사우어는 1954년부터 1962년까지 한국기독교 교회 협의회 회계로 교회복구 사업에 헌신했다. 연희대학교 한국어학당 당장으로, 그후 이사장으로도 봉직 하다가 1962년 4월16일에 정년 은퇴하고 본국에 귀국하여 1972년 9월13일, 오하이오주 애슐리에서 별세하였다. 그는 미국 감리회 선교부 연례대회에서 대한민국의 U.N.가입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제출하여 채택받게 될만큼 한국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 위해 헌신하고 존경받는 진정한 선교사이다.(참고문헌: 기독교대백과사전, 한국감리교 인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