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41] 올리버 R. 에비슨(Oliver R. Avison)

2377

김영문 목사(시카고나눔교회 담임)

오늘날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으로 (코로나19) 생명을 잃고 고통을 경험 하면서 의료 선교에 헌신했던 올리버 R. 에비슨(Oliver R. Avison) 선교사 사역의 소중함을 되새겨본다. 1895년 7월 그는 역병으로 불리우는 콜레라 퇴치운동을 전개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정부가 콜레라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을 때 평양과 서울에서 많은 사상자들이 일어났다. 당시 미신이 강했던 한국인들은 콜레라를 쥐 귀신이 사람 몸안으로 들어가서 발생되는 역병으로 생각하고 쥐 귀신의 천적 고양이 그림을 붙여놓고 역병을 물리치려고 했다. 사태 심각성을 나중에 깨닫게 된 한국 정부는 방역 예방 대책을 강조했던 에비슨에게 방역대책을 요청하여 적절한 대응으로 콜레라를 진정시켰다.

콜레라 퇴치로 한국 정부로부터 신임을 받은 에비슨은 고종의 주치의면서 백정 신분의 환자들까지 치료할수 있는 영역을 넓혀갔다. 그의 큰 업적은 한국 근대 서양의학과 고등교육을 크게 발전시켰다. 1900년에는 안식년을 미국에서 보내면서 한국 의료 선교의 확장을 시도 하였다. 이때 오하이오 출신의 석유회사 중역 루이스 H.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를 만나 그의 후원금을 받아제중원을 이전하여 한국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을 세웠다. 그후 1904년 제중원을 “세브란스”로 개칭하고 병원장에 취임 하였다 병원장이 된 그는 1906년 세브란스 병원 내에 간호학교를 설립하여 제중원 의학교 교육도 계속 시도 하였다. 그 결과 1908년 6월에 에비슨에 의해 한국인 최초의 면허 의사인 김필순을 비롯한 7명을 배출했다.

1915년 조선기독교학교(Chosun Christian College)를 세운 언더우드가 소천 하면서 에비슨이 교장으로 취임을 받아 1917년 사립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언더우드의 형인 존 언더우스(John T. Underwood)의 기부로 오늘날의 연세대학교로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교육계와 한국의 의료 개척 선교사로 많은 공적을 남겼다. 그가 선교사로 결심하여 조선땅에 오기까지 성장 과정을 살펴보면 1860년 6월 30일 영국 요크셔 주 웨스트 라이딩 제거 그린 마을에서 출생하였고, 그의 부친은 에비슨이 6살이 되던 1866년 가족을 데리고 미국을 거쳐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웨스턴으로 이주 하였다. 퍼드의 사범학교와 온타리오 약학대학, 빅토리아 의과대학을, 거치면서 교사, 약사, 교수, 의사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고 기독교와 관련해서도 해외 선교 모임, 개척 교회 성경지도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어느날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를 초청하여 교제중에 언더우드가 에비슨에게 해외 의료 선교사로 권유를 받게 되고 이에 강한 자극을 받아 교수직을 사임했다.

그는 캐나다 감리회를 다녔지만 미국 장로회 해외선교부의 의료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1893년 2월6일 의료 선교사로 임명받아 1893년 6월 아내와 세 아이들을 데리고 벤쿠버를 떠나 7월 16일 부산을 거쳐 8월에 서울에 도착 하였다. 33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 부임하여 41년 인생 대부분을 한국 선교를 위해 온 마음을 바쳐 헌신하다가 1956년 8월 29일 향년 96세로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소천하게 된다. 그는 평생 모든 부와 명예를 떨쳐 버리고 포용력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의 사업’을 강조하며 교파를 초월한 교회 연합운동의 선구자로 귀감이 되었다.(참고문헌: 기독신보, 양화진 선교사의 삶,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