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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울리노(활동연도 353-431년)

성 바울리노는 부유한 원로원 가문출신으로 프랑스 보르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르도의 학교에서 그리스-라틴 문화를 접했고, 시와 수사학은 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의 스승이었던 데치무스 막누스 아우소니우스로부터 배웠다. 그의 부친은 갈리아 지방의 총독이었다. 그는 성공적인 법률가로 성장해 여러 관직을 맡았고 골, 이탈리아, 에스파냐 등지를 여행했으며 에스파냐 여자인 테라시아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보르도의 주교 델피누스를 만난 후 영세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공직에 물러나 아키텐으로 은거했다. 390년 그는 에스파냐에 있는 아내의 영지로 이사했는데 그당시에 외아들이 죽음으로 막대한 재산을 교회에 희사하고 자신은 아주 엄격한 삶을 시작했다. 393년경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바르셀로나의 주교가 그를 사제로 서품하자 바울리누스 신부는 나폴리 근교인 놀라의 성 펠릭스 무덤 가까운 곳으로 이사했다. 이때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의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다. 그는 자선가로 유명했을 뿐 아니라 폰디에는 성당을 놀라에는 수로를 그리고 수도원 같은 분위기였던 자신의 집에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하도록 배려했다. 또는 그는 폭넓은 교우관계를 유지했는데 그들 가운데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히에로니무스, 암브로시우스, 투르의 성 마르티누스 등 수없는 명사들이 있었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51편의 편지, 32편의 시 등이 있다. 그는 프루덴티우스에 버금가는 대시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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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이노첸시오 5세(활동연도 +1276년)

프랑스의 타랑테즈앙포레에서 1224년경 태어나 ‘타랑테즈의 베드로’라고 알려진 그는 16새 때에 작센의 복자 요르단의 지도하에 도미니코회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1259년에 파리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대학 총장이 되었다. 그는 곧 유명한 신학자이자 설교자로 명성을 얻었고, 그의 친구인 성 토마스 데 아퀴너 등을 포함하는 연구위원회 회장을 맡았다. 37세 때에 그는 설교자회의 프랑스 관구장이 되면서부터 휘하에 있는 모든 수도원을 도보로 방문했고, 성 토마스 데 아퀴노를 파리 대학에 부임시켰다. 1272년에는 리옹의 대주교, 또 다음 해에는 오스티아의 교구장 추기경이 되었다. 그는 뛰어나고 적극적인 교황 대리자로 활약했고 그리스 이교 문제에 대해 책임 있는 활동을 했다. 1276년 1월 21일 그는 도미니코 회원으로는 처음으로 교황에 선출됐다. 교황이 된 복자 이노첸시오5세는 비록 그 재임기간이 5개월에 불과했지만 교황권을 지지하는 토스카나 연합의 구 엘프당과 신성로마제국을 지지하는 피사의 기벨린당을 화해시키고, 피사와 루카 도시 간의 평화를 회복시켰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1세와 앙주의 샤를 사이의 중재자로서 활약했다. 또한 그는 리옹 공의회를 통해 비잔틴과 재일치를 모색하다가 6월 22일 갑자기 선종했다. 그는 1898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시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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