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두표(시카고 문인회 회원)
아침에는 파리 떼가, 저녁에는 모기떼가 모인다. 는 뜻으로, 권력(權力) 주변에 소인배(小人輩)들이 몰려들어 나라를 좀먹고 망조(亡兆=亡徵敗兆)가 들어 나라가 결딴날 조짐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옛날 중 당기(中 唐期:766- 835 70년간)의 사상가, 정치가로 활동했던 <한유>(韓愈)(768- 824 57세로 병사함)가 그의 잡시(雜詩)에서 읊은 구절로, 그는 정치적으로는 불우하였으나 오히려 문단(文壇)에 있어서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제 1인자로서 그의 최대의 업적은 산문문체(散文文體)의 개혁이었습니다. 특별히 사회비판과 정치비판을 문학자의 사명으로 생각한 사람으로, 정치부재와 사회의 부패를 비판하는 ‘고음파’(苦吟派; 괴로운 심정을 읊는 詩의 형태)의 시인으로 더 유명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의 시장(市長)격인 당시의 경조윤(京兆尹)인 이실(李實)의 폭정(暴政)을 공격하였으며, 심지어는 천자(天子)인 헌종(憲宗)(805- 820 16년간 통치)이 불상(佛像)을 궁궐로 맞아들이려 하자, 유교(儒敎) 중심주의를 강조하여 반불(反佛)주의자인 그는 형부시랑(刑部侍郞=法務長官)으로서 <불골(佛骨)을 논하는 표(表)>를 올려 이를 막으려 했다가 천자의 노여움을 사 도리어 사형을 당할 번했다가 과거(817년) 50세 때 지방군벌인 오원제(吳元濟)를 토벌한 공적을 인정받아 겨우 풀려나 지방 광동성(廣東省)의 자사(刺史)로 좌천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럴 때 그는 정치비평문장가로서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이란 책에 잡시(雜詩)로 ‘조승모문’(朝蠅暮蚊)이라는 비판의 시를 썼습니다. 내용은 조그마한 이(利)라도 얻을까 권력주변에 우르르 몰려드는 소인배(小人輩)들, 마치 썩은 음식에 몰려드는 파리 떼처럼 그들이 날뛰는 세태(世態)를 빗대어 한 말입니다. 소인배들이 득세한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지만, 불과 얼마 후에 땅거미가 이 땅에 찾아오면 흔적도 없이 쫓겨나고, 모기떼가 또 극성을 부립니다. 낮에 파리는 음식 찌꺼기를 빨아 먹었는데, 밤에 모기떼는 사람이나 동물의 피를 빨아먹습니다. 그것도 적당히 먹고 날아가면, 자신의 목숨을 건질 수도 있으련만, 배가 불러 핏빛으로 벌게져 세상 모두에게 들통이 납니다. 즉 생계형 소인배들이 아닌 떼를 지어 ‘창귀형’(猖鬼形; 호랑이에게 물려죽은 귀신, 악인들을 도와 일한다.) 소인배들에게 온통 둘러싸여 있는 나라의 위기가 임진왜란 때처럼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으며, 백척간두(百尺竿頭)(막다른 위험에 빠짐)에 밀려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疑懼心)이 듭니다. 공자(孔子)는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 14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每於事而愼於言.’(군자는 식무구포 하고, 거무구안 하며, 매어사이신어언 이요.) 즉 ‘군자는 배불리 먹기를 구하지 않고, 편히 있기를 구하지 않으며, 일에는 민첩(敏捷)하고 말은 신중(愼重)히 하라.’ 위정자(爲政者)는 자기 한 몸의 안락(安樂)만을 앞세우지 말고 천하 만백성들의 안락과 행복을 우선 앞세워야 한다고 강조 했습니다. 또 참모(參謀)들을 뽑을 때도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있어야 한다며, 사람을 겪고서도 사람 보는 법을 배우려 하지 않을 경우 인사(人事)는 망사(亡事)가 된다고 경고 했습니다. 또 위정자는 인(仁)을 실천하고 염치(廉恥)를 알고 수기안민(修己安民)하고 도(道)를 지켜야 백성이 안심한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