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믿음으로 구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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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박사(횃불재단 트리니티 목회학 박사 프로그램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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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믿음이 있는 사람은 애통해한다. 마태복음 5:4-9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 대한 보조 설명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애통하지 않을 수 없다. 애통하다는 말은 (마 5:4) 마음이 가난한 상태에 놓인 사람에 대한 감성적 차원의 설명이다. 자신의 영적인 공허함을 인정하는 자, 죄로 인하여 자신이 전적으로 타락했음을 인정하는 자, 자신의 전적인 무능력을 인정하는 자, 자기를 구원하기에 자신이 너무나도 무능력함을 아는 자는 애통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전능자에게 울부짖는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랴?” 그러나 이렇게 심령이 가난함으로 애통할 때 위로를 받는다. 참믿음이 있는 자는 애통하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왜 위로받는가? 어떻게 위로받는가?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난함으로 애통하는 자는 천국이 주어지기에 위로받는다. 세상이 주는 위로가 아니다. 친구가 주는 위로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주는 위로다. 바로 이 위로는 심령이 가난함으로 애통해하는 자가 받는다.
다음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 즉 믿음이 있는 자의 특징은 온유함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 온유하다는 말은 심령이 가난한 자를 물질적 측면에서 설명하는 말이다. 성경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를 온유한 자로 칭한다. 세상의 법칙에 의하면,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할 수 없다. 공격적이며 전투적인 사람만이 땅을 차지할 수 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물질에 대하여 온유한 자, 말자자면 물질에 대하여 자유로운 자다. 마태복음 19장은 물질에 대하여 온유하지 않은 자의 예를 보여준다.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묻는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러나 그 청년은 물질에 대하여 자유롭지 않았다. 즉 물질에 대하여 온유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었다. 반면 누가복음 19장은 물질에 대하여 온유한 자의 예가 있다. 삭개오라는 세리장의 이야기다. 이 사람은 물질을 모으는 재미로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서 물질에 대하여 자유롭게 되었다. 물질에 대하여 온유하게 되었다.
천국은 이렇게 심령이 가난함으로 물질적으로도 온유한 자의 것이다. 이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천국이 완성되는 날,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을 선물로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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