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풀이] 竹林七賢(죽림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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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두표/시카고 문인회

중국 진(晋)나라 때의 청담가(淸談家)(속되지 않은 맑고 고상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7인을 말하는데, 즉 완적(阮籍), 혜강(嵇康), 완함(阮咸), 산도(山濤), 왕융(王戎), 향수(向秀), 유영(劉彾). 등이 항상 죽림(竹林)에서 노닐며,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허무설(虛無說)을 즐기고 세속의 형식적 도덕을 배척(排斥)하며, 세상을 피하여 자신의 안락을 꾀하였는데, 허무설이란, ‘천지만물은 인식(認識)을 초월한 “하나”라는 본체(本體)에서 발생하는데, 그 본체는 형상이 없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허무(虛無)임.’ 또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도 말하기를 상식적인 인의(仁義)와 도덕에서 보다 무위(無爲)를 주장한 것으로, 만사를 포함하는 대도(大道)는 무위이며, 무위로 돌아가면 난리(亂離)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위(無爲)란 자연 그대로 두어 인위(人爲)를 가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들은 정치적 계절(季節)에 명철보신(明哲保身)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국의 사군사(士君士)들에게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전해 내려온 자 들입니다. 죽림칠현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 <완적>(阮籍)(210- 263)인데, 위(魏)나라 사람으로 은자적(隱者的) 성격을 가장 진하게 가졌던 사람입니다. 문우 완우(阮瑀)의 아들로 정계(政界)에 절망하여, <노장>(老莊)(老子 와 莊子)과 신선(神仙)의 세계로 도피하여서, 음악과 정담(情談)으로 울적함을 달랬다. 형식적 예법에 반항하고, 방외(方外)의 선비는 청안(靑眼)으로 맞았으며, 예법의 선비는 백안(白眼)으로 맞았는데, 방외는 범위 밖의 세속사람을 말하고, 청안은 남을 좋은 마음으로 보는 눈이고, 백안은 노려보는 홀대하는 눈을 뜻합니다. <완함>(阮咸)은 <완적>의 조카로 진(晋)나라에 봉직하여 벼슬이 산기시랑(散騎侍郞)에 이르렀으나, 다른 현인(賢人)들과 시가(詩歌)를 즐겼으며, 속세를 버리고 벼슬을 거절하였다. 특히 음률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 비파(琵琶)를 잘 뜯었다. 명악(明樂), 청악(淸樂)에 쓰이는 완함(비파와 비슷한 악기이름)이라는 비파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술대를 쓰지 않고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것이 특색이라고 한다. <혜강>(嵆康)(223- 262) 위(魏)나라 사상가인데, 자유방자(自由放恣)한 성격으로 인하여 정계를 피하여 일민(逸民)(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도 세상에 나서지 않고 파묻혀 지내는 사람)이 되어, <노장>과 신선에 경도(傾倒)되었다. <완적>과 친교를 맺어 그들과 합류했으나, 여안(呂安)사건에 연류 되어, 형수와 간통이라는 무고를 받아 39세의 젊은 나이에 그만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의 저항의지를 권력자들이 모를 리가 없었고, 결국 탄압받게 되면서 청담사상(淸談思想)은 저항의식을 상실하고, 2류 학자들의 얼치기 따라 하기로 인해 망가지면서 청담사상은 사실상 권력가의 취미 삼아 하는 헛소리 경연대회라고 볼 수 있는 공담(空談)으로 급격하게 변질 되어버렸다. 덕분에 청담사상은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시대가 끝날 때까지 해악을 끼치게 되며, 공담을 즐기는 작자들이 자신들의 한탕놀음을 죽림칠현을 본 받은 것이 되고 말았다. 이에 후세의 평가까지 덩달아 떨어지는 불운을 겪게 된다. 이들은 혼자서 은거한 것이 아니라, 여럿이 모여서 단체행동을 했는데, 당대에 이름난 명사들이 모여서 은거(隱居)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려 집단행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