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의 아버지 I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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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관(시카고노인건강센터 사무장)

 

1950년 6월 28일 아침 7시경 인민군 탱크가 서울형무소를 점령했다. 중무장한 여군이 탱크위에서 열변을 토하는데 내용인즉 ‘이승만 괴래 도당은 곧 살아지고 김일성 수령님이 곧 남조선을 해방시킨다.’는 내용이다. 팔뚝에 붉은 완장을 찬 죄수들이 형무소 문을 박차고 나와 ‘조선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쳤다. 언제 배워두었는지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제목?)” 불러대는데, 곧 천지가 개벽되는 듯 혼란했다. 반장, 통장을 하던 어른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길거리 깡패와 노동자들은 기세가 등등해 밤거리는 무법천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두워지자 문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당시 ‘내부서’라는 것이 있어 사람들을 붙잡아 가는 때라 문소리에 너무나 놀랐다. 잠깐 침묵이 흐르자 “하 목사님 계세요?……..” 사람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재관아, 네가 나가봐라.” 말씀하시면서 자세를 바꾸어 앉으셨다. 나가서 어떻게 처신하라는 말씀도 없이 그저 나가 보라고 하시기에 나는 나막신을 끌면서 나갔다. “누구세요?” 물었다. “네, 敎化課에서 나온 임정체입니다. 목사님께 말씀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문을 열어주세요!” 급한 듯이 말했다. 이 이야기를 안에서 들으셨는지 아버지가 나오시면서 “임 집사 어찌 왔소?” 물으셨다.  “목사님, 몇 사람이 목사님 잡으러 이리로 오고 있으니 어서 피하십시오.” 말을 남기고 바로 떠났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세면도구와 성경가방만 들고 빨리 나가셨다. 어머니에게 “세검정에 있는 김용기 장로님 기도원으로 가겠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편안한 마음으로 있어요. 아무 일 없을 거요.” 말을 남기시고는 늘 다니시던 길을 피해 반대방향으로 가셨다.

아버지가 떠나신지 몇 분 안 되어 두 청년이 찾아왔다. 목소리와 행동 모두 조용했다. “목사님 뵈러 왔습니다. 계시죠?” 한 남자가 물었다. “조금 후에 돌아오실 겁니다. 좀 기다리시겠습니까?” 어머니가 말하셨다.  “그래요?” 중얼거리더니 둘이서 이방 저방 문을 열어보고는 “쌀이 많다고 들었는데….” 투덜댔다. 이렇게 30분이 지났을까 “곧 오신다면서 왜 안 오시죠?” 한 청년이 시비조로 물었다. “오시다 갑자기 심방하실 가정이 있으면 찾아가 예배드리고 오시느라 늦기도 합니다…. 이왕 기다리셨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어머니의 대답이다. 아버지가 안 오시는 것 잘 알고 있으시면서 눈 하나 깜짝 안하시고 거짓말을 하시는 것을 보고 그럴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30분정도 지났을까, 기다리기 지루하였던지 “오시면 내무서로 오시라고 하세요!”하고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어머니는 급히 편지를 써서 아버지에게 전하라고 내게 주셨다. 나는 그것을 허리춤에 차고 뛰기 시작했다.

빨간 능금과 녹친 자두가 한참인 세검정 골짜기는 평화로웠다. 자장가 같은 시냇물 소리와 종달새 우는 소리는 詩의 한 구절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김용기 장로님과 정자 밑에서 이야기하시던 아버지가 나를 알아보시고 닥아 오셨다. 그 동안 궁금하셨던지 “어머니는 어떻게 됬냐?” 물으셨다. 자초지종을 말씀 드리고 갖고 온 편지를 보여드렸다. 잠깐 생각하시더니 “같이 가자!” 하며 김용기 장로님에게 작별인사를 하시고는 내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셨다.(김용기 장로님은 한국 새마을 운동의 밑거름이셨던 농군학교 이사장님이시다)

아버지와 나는 영천 전차종점에 내려와 손 구르마(짐수레)를 얻어 피란 갈 준비를 시작했다. 세간도 별로 없었지만 짐을 챙기니까 제법 많았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모두 일어나 아침 예배를 드리고 주먹밥 소쿠리를 들고 집을 나왔다. 큰길가에 있는 내무서를 피해 골목길로 가느라 밤늦어서야 말죽거리에 도착했다. 늦은 밤이지만 사공은 마다 않고 우리 가족과 짐수레를 건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