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주전 63년 팔레스틴에 진입해 영토를 유대와 이두메로 축소시키고
마카비 혁명 가문인 하스몬 왕조의 히르카누스 2세가 대제사장과 분봉왕(ethnarch, 종족의
지배자라는 뜻)으로 임명되었으나 헤롯의 부친인 에돔 출신 안티파테르(Antipater)가 그를
뒤에서 조종하며 실권자로 부각되었다. 세에 기민한 외교가인 안티파테르는 폼페이와
줄리어스 시저가 다툴 때 교묘하게 후자를 지지하였고 폼페이가 살해되고 시저가 이집트
원정을 수행할 때는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시저는 승리 후 안티파테르에게 로마 시민권을
하사하고 그를 유대의 행정관으로 임명했다. 안티파테르는 자신의 아들들 중 파사엘을
유대에 헤롯을 갈릴리의 관리자로 세웠다.
그러나 파르티안이 침입해 들어와 자신들의 꼭두각시 안티고누스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았을
때 파사엘은 죽고 헤롯은 로마로 피신해야 되었다. 나중에 헤롯(주전 37-4)은 로마의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인의 왕’이란 칭호를 얻어 팔레스틴으로 돌아왔고 안토니의 도움으로
갈릴리를 정복한 뒤 주전 37년에는 예루살렘까지 장악했다. 이 헤롯은 로마가 다시 내전에
들어갔을 때 안토니를 지원하지 않아 옥타비안의 환심을 샀고 그래서 유대의 통치를
인정받아 왕의 칭호를 계속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헤롯 대왕의 사후 유대는 그의 아들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헤롯 아켈라우스는
분봉왕(ethnarch)으로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담당했으나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 소요와
탄원이 잦았다(주전 4 – 주후 6). 마태는 예수의 부모가 유대를 피해 갈릴리의 나사렛에 가서
살게 된 이유를 아켈라오 때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마 1:22-23). 결국 로마는 통치력에
문제를 보이는 그를 고올(Gaul)로 추방하고 그가 담당하던 지역을 로마가 파견한 총독 관할에
두었다. 헤롯 대왕의 다른 아들 헤롯 안티파스(주전 4 – 주후 39)는 능력이 출중해서 오랫동안
갈릴리와 페레아의 사분봉왕(terarch)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감당했다. 안티파스는 자신의
이복 동생인 헤롯 빌립(아래의 사분봉왕 빌립과는 다른 사람)의 아내 헤로디아를 탐내
나바티아의 왕 아레타스 4세의 딸과 이혼을 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처형하여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예수는 주로 갈릴리에서 사역을 담당했기 때문에 그의 삶과 이어진 공생애
동안 헤롯 안티파스의 치하에 있었던 셈이다. 빌립은 갈릴리 북동쪽의 이두레아와
트라코니티스를 주후 34년 죽을 때까지 무리 없이 잘 통치했다.
주후 37년 칼리굴라가 로마의 황제가 되면서 헤롯 대왕과 마리암 사이에서 태어난 뒤 로마로
보내져 교육을 받았던 헤롯 아그립바가 세력을 잡았다. 칼리굴라는 자기 친구 헤롯
아그립바를 왕으로 호칭하여 빌립과 루사니아가 다스리던 영토(눅 3:1)를 그에게 맡겼다.
그러자 안티파스도 왕의 명칭을 확보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가 오히려 칼리굴라의 분노를 사
39년에 그의 영토마저 아그립바에게 넘겨야 했다. 이 아그립바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둔 사람이다(행 12장). 그의 아들 아그립바 2세는 아버지의 땅 일부만
통치하게 되었고 사도행전 26장에서 바울의 변명을 들은 이가 바로 이 사람이다. 강력한 로마
지지자였던 그가 주후 92(93)년에 죽음으로써 헤롯 가계는 역사에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