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방 무기 이용한 우크라 공격에도 핵 대응 가능
러시아가 4년여 만에 핵 사용 교리(독트린)를 완화했다. 우크라이나 ‘특별군사작전’을 둘러싼 국제상황의 변화에 맞췄다는 이유에서다.
프랑스와 같은 나토 일부 회원국에서 파병론까지 제기하는 터에 러시아는 서방의 직접 개입을 억지하기 위해 핵 교리 개정으로 초강수를 둔 것으로 보인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개정 핵 교리를 승인하자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우리의 원칙을 현재 상황에 맞출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미국을 포함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우크라이나에 군사 지원을 제공하며 러시아와 간접적으로 군사 대립하는 상황을 고려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2020년 6월 이후 4년여만인 이번 개정으로 세계 최대 핵무기 보유국 러시아는 핵무기 사용의 문턱을 낮췄다.
기존엔 ▲ 핵무기나 다른 대량살상무기가 러시아나 동맹국에 사용됐을 때 ▲ 적의 재래식 무기 공격이 러시아의 존립을 위협할 때 ▲ 러시아나 동맹국의 영토를 겨냥해 탄도미사일이 발사됐다는 믿을만한 정보가 입수됐을 때 ▲ 보복 핵공격 능력을 약화할 수 있는 핵심 정부·군사 시설이 공격당했을 때 핵무기 사용을 최종적 수단으로 고려할 수 있었다.
이번 개정으로 ▲ 러시아와 동맹국인 벨라루스의 주권과 영토 보전에 중대한 위협을 주는 재래식 무기 공격이 있을 때 ▲ 러시아와 동맹국에 대한 핵무기 및 대량살상무기 공격이 있을 때 핵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됐다.
러시아가 핵무기 사용을 결심할 수 있는 상황이 ‘국가 존립을 위협할 때’에서 ‘국가 주권과 영토 보전에 중대한 위협을 줄 때’로 완화된 것이 가장 중요한 변화다.
개정 핵 교리에는 핵보유국의 지원을 받은 비핵보유국에 의한 어떠한 공격도 공동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기존 교리에서 러시아가 핵 억지력을 주로 핵무기 보유국을 대상으로 했던 것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이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 핵보유국 미국, 영국, 프랑스의 지원을 겨냥한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장거리 무기로 러시아 본토를 타격할 수 있도록 이미 승인했고 프랑스 등 다른 서방 국가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러시아가 가장 경고했던 결정이다.
우크라이나가 서방의 장거리 미사일로 타격해 주권과 영토 보전에 중대한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면 러시아는 핵무기로 보복 공격에 나설 수 있으며 비핵보유국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미국 등 서방도 표적에 포함할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이날 새벽 러시아 접경지 브랸스크에 미국산 장거리 미사일 에이태큼스(ATACMS) 발사를 감행한 만큼 러시아가 새 핵 교리를 적용해 핵 대응 카드를 고려할 가능성도 있다.
시간상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로 미국 미사일을 발사한 뒤 이를 보고받았을 푸틴 대통령이 새 핵교리에 서명했다.
러시아는 다만 핵무기 사용이 국가 주권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최후 수단이라는 기본 원칙이라는 점도 교리에서 강조하고 있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러시아가 항상 핵무기를 억지 수단으로 간주해 왔다”며 “러시아가 대응해야 강제적인 상황에서만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새 교리는 또 잠재적 적의 항공기, 미사일, 드론을 이용한 대규모 항공 우주 공격에도 핵 보복을 고려할 수 있으며 적이 우주에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배치하는 것도 위협으로 간주한다고 명시했다.
러시아의 핵 교리 개정을 ‘엄포’로만 볼 수 없는 정황도 주목된다.
러시아는 핵폭발로 인한 방사능 오염에서 자국민을 보호하는 모듈형 이동식 대피소 ‘KUB-M’ 대량 생산에 돌입했다.
러시아 매체 뉴스.루는 이 대피소가 최대 54명을 수용할 수 있고 모듈을 추가 설치하면 수용 인원을 늘릴 수 있으며 기존 고정형보다 저렴하고 설치도 간편하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