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 김
영화 칼럼니스트/시카고
‘라몬’은 젊은 날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목 아래로 전신마비가 됩니다. 그렇게 28년을 살았습니다. 입으로 펜을 물고 글을 쓰고 조카의 도움으로 컴퓨터를 사용하고, 음악을 듣고 텔레비젼을 봅니다. 라몬의 식구들은 진심으로 라몬을 사랑하고 힘껏 그를 돌봅니다.
늙은 아버지는 아들의 비극에 애통해하고 무뚝뚝한 형은 동생을 보살피기 위해 어부 생활을 접고 농장에서 일을 합니다. 속깊고 부지런한 형수는 집안 일을 하면서 24시간 라몬의 시중을 듭니다. 고등학생 조카는 아들처럼 친구처럼 삼촌의 비서 노릇을 합니다. 식구들 모두 라몬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라몬은28년간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꼼짝 못하는 자신의 삶을 계속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가진 채 자유 의지로 죽음을 택하려고 합니다.
스페인 법과 사회적 통념은 안락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라몬의 심리치료사이고 오랜 친구인 ‘제네’는 라몬의 편에 서서 그의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백방으로 애씁니다. 라몬을 법적으로 대변해 줄 변호사 ‘훌리아’가 라몬을 찾아옵니다. 훌리아는 라몬을 인터뷰하면서 그의 죽음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삶에 대한 통찰, 자유로운 영혼과 지성에 매료됩니다. 훌리아 자신도 치명적인 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어서 언제 몸의 기능이 마비되어 죽게될지 모릅니다. 라몬과 훌리아는 서로에게 끌립니다.
라몬의 케이스가 법정에서 다루어지면서 텔레비젼 뉴스에도 나오게 됩니다.
힘들게 일하는 젊은 싱글맘 ‘로사’는 라몬의 이야기를 보고 무작정 그를 찾아옵니다.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설득하려던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와 애정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라몬에게 오히려 위로와 격려를 받습니다.
훌리아는 라몬이 틈틈히 쓴 글들을 읽고 감동합니다. 라몬을 설득해서 책으로 출판하기로 결정합니다. 훌리아가 라몬의 집에 머무는 동안 그녀에게 심장 발작이 일어납니다. 훌리아는 공포에 휩싸여서 자신도 라몬처럼 안락사를 택하겠다고 합니다.
심리치료사 제네가 충고합니다.
“공포는 아주 힘이 세지요. 우리에게 선택하고 결정할 자유를 주지 않아요.
결코 두려움에 휩싸여 행동하면 안됩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자유 의지로 죽음을 선택한 라몬과 달리, 죽음에 대한 공포로 삶을 마감하지 말 것을 설득합니다.
라몬의 요구는 법적인 논쟁뿐 아니라 종교적인 이슈로까지 번집니다. 라몬처럼 전신 마비가 되어 휠체어를 탄 신부가 라몬을 방문합니다. 이층의 침실에 누워있는 라몬과 아래층 휠체어에 앉아있는 신부 사이에 생명과 신에 대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종교적 권위와 아집으로 뭉친 신부는 라몬의 진지하고 예리한 사고에 항변도 못하고 물러갑니다. 법정은 라몬의 요구를 기각합니다. 라몬은 단호합니다. 나를 진정 사랑한다면 (법적이고 윤리적인 책임과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할수있게 도와주는 것이라고.
가족들의 갈등과 괴로움도 큽니다. 아들이 절실히 죽음을 원한다는 사실이 아들이 죽는 것보다 더 가슴이 아픈 아버지. 자신의 집에서 절대로 동생을 죽게 놔둘 수 없다는 형.
28년을 돌보아서 이제는 시동생이 자식처럼 느껴지는 형수. 침대에 누워있는 삼촌의 분신같은 조카.
라몬을 사랑하는 로사는 라몬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결심합니다.
제네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라몬이 죽고나서 아무도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도록 세심한 준비를 합니다.
어느 청명한 날, 라몬은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합니다. 가족들의 얼굴을 눈에 담고 로사의 차를 타고 집을 떠납니다. 로사는 호텔방에서 라몬과 오붓한 밤을 보내고, 약을 탄 음료수를 건넵니다. 라몬은 마침내 편안하게 자신의 소원을 이룹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스페인의 국보급 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이 눈빛과 얼굴 표정으로 사지마비 라몬의 고독하고 상처받은 내면을 소름끼치게 연기합니다. 안락사라는 무거운 주제를 아주 담담하고 사실적이고 공감가게 풀어갑니다.
삶은 권리이지 의무가 아니라는 라몬은, 그래서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처럼 원하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라몬은 갇힌 몸이지만 그의 정신과 영혼은 나비처럼 자유롭습니다.
영화의 명장면.
바다가 보이는 침실, 오페라 ‘투란도트’의 ‘공주는 잠 못이루고’ 아리아가 흐릅니다. 환상속에서 라몬은 침대에서 일어나 하늘을 날아 해변에서 산책하는 훌리아에게 갑니다.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부드럽게 포옹합니다. 아름답고 애절한 장면입니다.
자연스럽고 강렬한 배우들의 연기와 감미롭고 슬픈 음악, 유머와 이해가 녹아있는 대사, 밝고 화사해서 가슴저린 영상까지 훌륭합니다.
라몬이 떠나는 날, 라몬을 보내는 가족들의 어리숙하고 부서질것같은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남겨지는 고통과 그리움도 기꺼이 떠안는 것이겠지요.
2005년 오스카와 골든 글로브, 최우수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