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범죄’빌미 추방, 워싱턴 한인에 현실로 닥쳤다

33
이민자 추방 정책 반대 시위에 참가한 고등학생들이 항의의 푯말을 들고 있다.

▶ 워싱턴서 대학졸업 후 OPT 취업중 한인 K씨에 ‘5년전 난폭운전’ 이유 ICE “당장 미국 떠나라”

트럼프 행정부가 불법이민자는 물론 합법 비자를 받고 체류 중인 유학생까지 비자를 취소해 대거 쫓아내는 추방의 광기 속에 워싱턴 지역의 한 청년이 5년 전의 난폭운전(reckless driving) 기록이 빌미가 돼 학생비자 취소 통보를 받았다.

20대 중반의 K씨는 지난 8일 국토안보부(DHS) 산하 이민세관단속국(ICE)으로부터 “여권에 있는 학생 비자 취소와 SEVIS(유학생 및 교환방문자 관리 시스템) I-20 입학 허가서가 취소됐다”며 유예기간 없이 “즉시 미국을 떠나라”는 날벼락 통보를 받았다.

고교 때 미국으로 유학 와 워싱턴 지역의 한 대학을 졸업한 후 OPT로 취업 중인 그는 대학 재학 때인 2020년에 난폭운전으로 경찰에 걸린 기록이 문제가 됐다. 현재 아무런 잘못도 없이 ICE의 일방적인 통보를 받은 K씨는 “학생 시절 스피드 오버로 난폭운전에 걸린 게 이토록 큰 죄가 될 줄 몰랐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눈앞이 캄캄하다”고 망연자실해 했다.

K씨가 보내온 서류를 살핀 전종준 변호사는 “주마다 형사법 규정이 다를 수 있으며, 난폭운전이 경범 형사사건인데도 미국비자 취소 통보를 했다. 이제는 학생 비자 신분까지 취소하는 강경 반이민 정책을 펼치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이어 “통지문을 보면 한국에 간 뒤 미국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취소해야 하고 미국 재입국이 힘들다고 표기돼 있다. 미 대사관의 비자 거절이나 취소는 사법 심사의 대상이 아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의 인생이 망가지게 생겼다”고 안타까워 했다.

전 변호사는 “루비오 국무부 장관이 300여명의 학생 비자를 취소했다고 발표했듯이 음주 운전, 부부싸움, 간단한 교통 법규 위반으로 법원에서 지문을 찍은 경우만으로도 비자를 취소하고 내쫓고 있다”면서 “지상사 직원이나 교환 연수생 등 다른 종류의 비이민 비자로 미국에 체류중인 사람들의 비자 취소 및 체류 허가 취소 통보가 적용될 지 지켜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는 한 유학생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다 경찰에 리포트 된 후 법원의 기각(Dismiss) 선고를 받았음에도 학생 비자 취소 통보를 받기도 했다.

한편 미 CNN과 NBC 방송 등은 10일 트럼프 행정부 들어 뉴욕과 보스턴, 캘리포니아 등 미 전역의 22개 주에서 300명이 넘는 유학생 비자가 돌연 취소됐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초기에는 컬럼비아대에서 친팔레스타인 시위를 주도한 후 체포된 마흐무드 칼릴과 비슷한 사례가 많았는데, 최근에는 경범죄를 이유로 비자 취소와 함께 추방 위협을 받는 학생이 늘어나고 있으며 아무런 이유 없이 표적이 된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런 유학생 비자 취소의 법적 근거를 1952년 제정된 이민·국적법에 두고 있는데, 이전까지 거의 사용되지 않은 해당 법 조항에 따르면 미 국무장관은 “미국에 잠재적으로 심각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판단될 경우 시민권자가 아닌 사람을 추방할 수 있다.

국무부는 비자 취소 사유가 불분명한 사례들에 대한 NBC의 질의에 “개인정보 보호 문제 때문에 개별 비자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는다”며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국경을 보호하고 지역사회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매일 비자를 취소한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컬럼비아대 로스쿨의 이민자 권리 클리닉 책임자인 엘로라 무커지는 당국의 표적이 된 대부분의 학생이 백인이 아닌 인종 배경을 지니고 있다면서 “현재 미국의 이민 정책은 외국인 혐오, 백인 우월주의, 인종주의에 의해 주도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CNN은 미 정부 보고서 등을 인용해 2023년 기준 미국 내 학생 비자 소지자는 150만여 명이며, 교환 방문 연구원 프로그램으로 체류 중인 인원은 약 30만 명이라고 전했다.

<정영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