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규 관장이 그리는 문화지도
2025년 5월 14일 수요일, 늦은 봄 햇살이 따사롭게 관장실 창을 적신 그날 오후, 대전예술의전당에서 김덕규 관장을 만났다. 2023년 부임 이래, 그는 단순한 공연장 운영자를 넘어 지역 문화예술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가고 있는 선구자다. 인터뷰는 공연장을 둘러싼 대담한 비전, 예술과 기술의 융합, 그리고 대전을 세계 무대로 이끄는 포부로 가득했다.

“시민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다” – ‘시그니처 대전’의 탄생
“예술이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며, 그 중심엔 시민이 있어야 합니다.” 김덕규 관장은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처럼 올해 새롭게 선보인 ‘시그니처 대전’은 단순한 축제 브랜드 변경이 아니라, 예술의 본질을 되새기며 시민과 예술의 거리를 좁히려는 철학적 선언이다.
기존 ‘스프링페스티벌’을 과감히 재구성해 연중형 공연예술축제로 확장한 이 프로젝트는 클래식, 연극, 뮤지컬, 전통예술 네 장르를 중심으로 대전 시민의 다양한 문화 욕구를 충족시키고, 지역 예술인에게는 장르 간 협업의 장을 제공한다. 단순히 장르를 나열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시리즈마다 관객과 예술의 접점을 어떻게 확장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 결과물이다.
첫 시리즈였던 클래식 공연 ‘Night of Big Bang’은 신선한 기획과 실험적 무대 연출로 젊은 관객층의 호응을 끌어냈고, 이후 연극 ‘불의 고리’가 관객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연극은 대전이라는 공간과 시민의 삶을 주제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스토리텔링으로 무장해 지역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김 관장은 “예술은 무대 밖 현실과 연결돼야 한다”며, ‘시그니처 대전’을 단순한 공연이 아닌 ‘시민의 삶이 녹아든 무대’로 만들고자 한다. 그는 이 축제를 ‘공연예술의 민주화’로 정의한다. 시민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작품의 동반자이며 창작의 일부라는 것이다. 예술의전당이 시민과 예술이 함께 숨 쉬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그의 의지가 곳곳에 묻어난다.
“공연장은 더 이상 관객이 조용히 앉아 감상하는 공간에 머물러선 안 됩니다. 예술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여야 합니다.” 김 관장의 말엔 예술을 생활로 끌어오려는 분명한 철학이 담겨 있다.
그는 이어 “문화예술은 도시의 브랜드입니다. 예술의전당이 만들어내는 축제는 곧 대전이라는 도시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죠. 우리는 이 축제를 통해 대전을 전국적이고 세계적인 예술 중심지로 키워가고자 합니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그는 이번 프로젝트가 일회성 행사가 아닌 장기적인 도시 전략의 핵심으로 기능하길 바라고 있다.
‘시그니처 대전’은 시민 참여, 예술 창작, 도시 정체성이 어우러진 대전의 새로운 봄이다. 김덕규 관장은 이 축제가 시간이 지날수록 시민들에게 ‘기대되는 계절의 상징’으로 자리잡기를 희망한다. 그의 말에는 예술이 소수의 전유물이 아닌, 시민 모두의 일상이 되는 도시를 향한 분명한 비전이 담겨 있다.
장한나와 함께, 대전을 세계로 – ‘대전그랜드페스티벌’
“장한나 예술감독은 젊고 열정적인 음악가들을 대전으로 불러들이는 힘을 가진 예술가입니다.”
김덕규 관장은 장한나와의 협업이 대전의 공연예술에 불러온 변화에 깊은 신뢰를 보냈다. 그가 추진 중인 ‘장한나의 대전그랜드페스티벌’은 단순한 음악축제를 넘어, 도시의 정체성과 문화적 야심을 드러내는 대표 브랜드로 성장하고 있다.
2024년에 첫 선을 보인 이 페스티벌은 기존 클래식 음악제의 보수적 틀을 깨고, 파격적 구성과 젊은 연주자 중심의 무대로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축제의 두 번째 해인 올해는 주제를 ‘불멸의 사랑(Immortal Beloved)’으로 정하고, 베토벤의 삶과 예술에서 영감을 받은 사랑 이야기를 무대에 펼친다. 김 관장은 “사랑이라는 인류 보편의 감정을 클래식으로 풀어낸다는 시도가 시민의 감성을 더욱 자극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전했다.
특히 가장 주목할 프로그램은 ‘투티(Tutti)’다. 장한나의 지휘 아래 시민 아마추어 연주자와 프로 오케스트라가 한 무대에서 호흡하는 이 무대는 “예술의 민주화가 실현되는 상징적 장면”이라며 김 관장은 강조했다. “공연장이 단순히 관람 공간이 아니라, 직접 연주하고 교감하는 곳이 될 때 문화는 비로소 살아 숨 쉽니다.”
이 밖에도 마스터클래스, 오픈 리허설, 아티스트와의 대화 등 부대 프로그램이 풍성하게 마련되어 있다. 클래식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시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구성된 이 프로그램들은, 예술의 문턱을 낮추려는 김 관장의 의지를 보여준다. “예술은 전문가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술의 주체가 되어야 진짜 문화도시가 완성됩니다.”
김 관장은 이번 축제를 단순한 관람이 아닌, ‘예술과 함께 존재하는 경험’으로 만들고자 한다. 대전이라는 도시가 예술을 통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도시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플랫폼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는 또 “올해부터는 해외 음악 관계자들도 일부 초청할 예정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이 페스티벌이 아시아를 대표하는 클래식 음악제로 성장하길 바랍니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그 중심에는 세계적인 지휘자 장한나와 지역을 세계와 잇는 김덕규 관장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빚어내는 무대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다.
“예술은 도시를 풍요롭게 만들고, 사람을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우리가 함께 만드는 이 축제가 대전을 다시 보게 하고,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술과 예술의 융합, 그리고 세계를 향한 도약 – AAPPAC 대전총회
올해 대전예술의전당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행사를 단 하나만 꼽자면, 단연 아시아태평양공연예술센터연합회(AAPPAC) 대전총회일 것이다. 오는 10월 21일부터 23일까지 열리는 이번 총회는 전 세계 20개국, 80여 개 공연기관의 대표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형 국제행사로, 공연 예술계에 있어서는 ‘올림픽’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김덕규 관장은 이 총회를 단순한 회의 이상의 플랫폼으로 보고 있다.
“이번 총회의 주제는 ‘From Local Inspiration to Global Influence(지역적 영감에서 세계적 영향으로)’입니다. 이는 대전이라는 도시가 가진 정체성 즉, 과학기술의 뿌리 위에 창조성을 더해 전 세계 공연예술의 미래를 이끌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대전은 오랜 시간 ‘과학의 도시’라는 정체성을 지녀왔다. KAIST와 대덕연구단지를 중심으로 축적된 과학기술 인프라는 한국 내에서도 독보적이다. 김 관장은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우리가 가진 과학기술 자산을 예술과 접목한다면, 대전만의 독창적인 공연예술 모델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델은 곧 세계 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죠.”
실제로 이번 총회에서는 미디어 아트, 인공지능, 센서 기술, 인터랙티브 플랫폼 등을 활용한 융복합 공연이 집중 조명될 예정이다. 단순히 무대 위에 기술을 적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술이 공연의 서사와 감성에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지를 실험하고 공유하는 장이 마련되는 것이다.
“예술과 기술이 단순히 나란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무대 언어’를 창조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21세기형 공연예술의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관장은 이번 총회를 ‘대전 예술의 르네상스를 여는 신호탄’으로 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실험과 혁신이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공간이 바로 총회 기간 중 함께 열리는 ‘공연실험실 X-SPACE’ 쇼케이스다.
“X-SPACE는 올해 대전예술의전당이 추진한 융복합 공연 중 가장 도전적인 시도들을 국제 무대에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단순한 발표회가 아니라, 새로운 공연예술의 미래를 논의하고 공유하는 실험의 현장이죠.”
이 쇼케이스에서는 국내외 예술인과 기술자들이 협업해 완성한 프로젝트들이 무대에 오른다. 예술작품이 관객과 ‘상호작용’하며 변화하거나, AI가 연주의 일부를 실시간으로 생성해 내는 등, 전통적인 공연 문법을 뒤흔드는 실험들이 펼쳐질 예정이다. 김 관장은 이를 “미래 공연예술의 생태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표현했다.
또한 AAPPAC 총회 자체도 하나의 국제 교류의 플랫폼으로 기능하게 된다. 공연예술 기관장들과 기획자들 간의 포럼, 협력 사업 논의, 네트워크 미팅 등 다층적인 프로그램이 계획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대전은 단순한 개최지를 넘어 실질적인 협업과 창작의 ‘허브 도시’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제는 콘텐츠도, 무대도 국경을 초월해야 합니다. 대전에서 출발한 공연이 뉴욕, 도쿄, 싱가포르에서 울려 퍼질 수 있어야 하고, 반대로 전 세계의 흐름이 대전으로 흘러들어올 수 있어야 합니다. 이번 총회는 그 흐름을 만드는 시작점입니다.”
결국 이번 AAPPAC 대전총회는 대전예술의전당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도시 전체를 창의성과 혁신의 ‘생태계’로 바꾸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일시적인 이벤트가 아닌, 향후 10년, 20년을 내다보는 미래 비전의 시발점이다.
“예술의 도시 대전, 기술의 도시 대전. 이 두 개의 얼굴을 하나로 이어주는 무대가 바로 AAPPAC 대전총회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전의 새로운 정체성을 쓰고 있습니다.”
김덕규 관장의 이 말은 단순한 홍보성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예술과 기술, 지역과 세계, 지금과 미래를 하나로 잇는 ‘창조의 도시 대전’이라는 새로운 비전의 실현 선언이었다.
예술로 도시의 얼굴을 바꾸다
김덕규 관장은 예술을 통해 도시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그의 계획은 단순한 공연기획에 그치지 않는다. 시민의 일상에 스며드는 예술, 지역 예술인의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는 무대, 그리고 세계와 대등하게 교류할 수 있는 플랫폼 구축이 목표다.
“예술의전당은 공연장일 뿐 아니라, 이 도시의 문화 자존심입니다. 이곳이 변해야 대전이 변하고, 한국의 문화예술 생태계도 함께 진화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은 이상이 아닌 현실이다. 취임 2년이 채 되지 않아 그는 굵직한 축제들을 성공적으로 재정비했고, 국제 무대와의 연결점도 빠르게 넓혀가고 있다. 무엇보다 지역 시민들과의 접점을 소중히 여긴다는 점에서 그는 대전예술의전당의 ‘외연’을 넘어 ‘내실’을 다지는 중이다.
“문화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인터뷰 말미, 그는 조용히 한 문장을 남겼다.
“문화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일상 속에 있고, 우리가 손 내밀면 언제든 함께 할 수 있는 것이죠.”
김덕규 관장이 그리는 미래는 대전이라는 도시를 넘어, 예술이 삶과 만나는 모든 공간을 향하고 있다. 대전예술의전당은 그 중심에서, 시민과 예술을 이어주는 든든한 다리가 되어가고 있다.

<이가희 시카고한국일보 한국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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