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지도를 바꾼 남자’박연수, 도시에서 미래를 설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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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수 전 소방방재청장(좌) 과 본지 특파원(우)이 '대한민국의 미래에 위하여' 인터뷰를 하고 있다.

지난 6월 9일, 대전 오정동의 한 카페에서 박연수 전 소방방재청장을 만났다. 그는 환한 미소로 기자를 맞으며 “오늘 같은 날, 미래 이야기를 하기 딱 좋습니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도시계획가이자 방재 전문가, 그리고 ‘대한민국의 지도를 바꾼 남자’라는 별명을 지닌 그는, 자신 있게 미래를 설계하고 현실로 구현해 온 인물이었다.

‘포스트 홍콩 전략’에서 시작된 미래 도시의 설계
“당시에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도를 바꾸겠다는 각오로 시작했죠.”
1986년 인천직할시 도시계획국장으로 재직하던 박 청장은 중국의 개방과 홍콩의 반환을 예견하며, 국제비즈니스 허브의 공백을 한국이 채워야 한다는 전략적 구상을 세웠다. 그는 인천 앞바다를 매립해 첨단 미래도시 ‘송도국제도시’를 만들고, 인접한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 바다를 메워 24시간 운영되는 세계 최고의 허브공항을 짓겠다는 기획을 내놓았다. 이 구상이 바로 오늘날의 인천국제공항과 송도국제도시다.
“Intelligent City, 즉 지능형 도시를 만들겠다는 목표였어요. 첨단기술과 녹색 환경을 모두 갖춘 미래형 신도시 말입니다. 대한민국이 ‘변방’에서 ‘중심’으로 이동하려면 이런 대전환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비전을 이렇게 요약했다. “지리를 넘어서 전략으로. 저의 별명 ‘대지남’은 그렇게 생긴 겁니다.”

동북아의 실리콘밸리를 향한 도전
그의 계획은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 실행으로 이어졌다. 1989년, 이재창 당시 인천시장으로부터 30억 원의 예산을 받아 송도 개발을 본격화했고, 지금은 그 도시가 여의도의 17배 규모로 성장해 시가총액 300조 원을 넘는다.
“당시엔 30억이 전부였죠. 하지만 저는 미래를 설계하는 데 필요한 건 돈보다 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지향한 도시는 단순한 주거공간이 아니라 IT, BT, NT, FT 산업이 융합된 글로벌 비즈니스 생태계였다. 그는 이를 ‘동북아의 실리콘밸리’로 불렀고, 현재 송도는 세계 최대의 바이오 클러스터로 자리 잡았다. “물론 아직 미완입니다. 인프라와 융합 생태계는 더 채워야 해요. 하지만 방향은 정확했고, 결과는 증명됐습니다.”
박 청장의 비전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도시 DNA를 심는 일이었다. “송도는 공간이 아니라 전략입니다. 국가의 미래가 도시에서 시작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도시를 그리던 사람이, 안전을 설계하다
박연수 전 청장은 33년의 공직생활 가운데 절반은 도시계획, 절반은 재난관리와 방재행정에 헌신했다. 기술고시 출신으로 토목공학을 전공했고, 석사와 박사과정에서는 도시계획을 택했다. 그는 늘 현장에 답이 있다고 믿었다.
“도시계획은 공간을 그리는 일 같지만, 실은 사람을 지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방재는 도시의 뼈대이자 생명선이에요. 아무리 멋진 도시라도, 재난에 취약하면 생명을 잃는 도시에 불과합니다.”
그는 도시를 설계했던 시선으로 재난을 분석했고, 실사구시적 태도로 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저는 말보다 실천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계획은 책상 위에서 끝나선 안 됩니다. 현장에서 작동해야죠.”
박 청장은 재난을 막기 위한 정책이 추상적이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그는 도시의 구조부터 시설 설계, 인구 동선까지 통합적으로 바라보며 방재정책을 설계했다. “도시는 기술로 짓지만, 생명은 철학으로 지키는 겁니다.”

초고층 화재 앞에서 잠을 못 이룬 청장, 특별법부터 물포 헬기까지, 구조를 뛰어넘은 제도 개혁
그가 소방방재청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는 그의 마음속 ‘시한폭탄’이었다. 지하 전체가 연결된 대형 몰과 고층빌딩이 복합된 구조 속에, 하루 수십만 명이 오가는 현실. “불이 나면 대피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훈련도 실효성이 없었어요.”
이런 복합건축물이 전국적으로 허가되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초고층 및 지하연계 복합건축물 안전관리 특별법’을 제정했다. 세계 최고층 빌딩이 건설 중이던 두바이 현장을 직접 방문해 청장과 의견을 나누고, 피난층을 의무화하는 제도를 국내에 도입했다. “건축은 위로만 솟아오르면 안 됩니다. 안전이라는 기초가 단단해야 합니다.”
실제 사건이 그에게 경각심을 안기기도 했다. 해운대 고층 아파트 화재 현장. 소방차도, 사다리도, 호스도 닿지 않았다. 계단을 통해 진입한 소방관들의 목숨 건 구조로 겨우 인명피해를 막았지만, 그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헬기 물포 시스템, 고성능 사다리차, 고층 화재 대응 매뉴얼을 전면 재정비한 건. 그러나 진짜 해법은 다른 데 있어요. 건축 단계에서부터 화재를 염두에 둬야 합니다. 스프링클러 하나가 생명을 살립니다.”
박 청장은 시민들의 인식 전환도 강조했다. “아파트를 살 때 화재 대응 시스템을 확인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해요. 그래야 건축업자도 진지해집니다. 안전은 제도와 시민의 감시가 함께 갈 때 가능합니다.”

“재난은 막을 수 있다” 실행하는 방재, 현장을 움직인 리더십
박연수 전 소방방재청장이 취임하면서 처음 내건 목표는 불가능해 보였다. 재난 사망자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것. 하지만 그는 실현해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소명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었으니까요.”
그가 제시한 조직 목표는 ‘작동하는 방재, 한발 앞선 대응’이었다. 말로만 하는 대비가 아니라, 현장에서 실제로 움직이는 방재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다짐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대응은 공문 중심이었어요. 시·군·구 말단 기관들은 수십 장의 공문 처리에 치여 정작 대비는 뒷전이었습니다.”
박 청장은 그부터 바꿨다. 대비하라는 지시 대신, 구체적 실행계획과 예산, 인력, 인센티브를 함께 제공했다. 그는 직접 현장을 챙기고 지휘 인력을 투입했다. 그 결과는 임기 중 재난 사망자 수 50% 감소라는 놀라운 성과로 나타났다.
그는 사고와 자연재해를 구분해 접근했다. “인적재난은 예방에, 자연재해는 대응에 집중해야 합니다. 사고는 반드시 예방이 가능합니다. 사실 사고가 발생하려면 수많은 부실과 탐욕, 시스템의 붕괴가 완벽히 연결돼야 합니다. 그 고리 중 하나만 끊어도 사고는 일어나지 않아요.”
세월호 참사도 그러했다. 출항 결정, 불법 구조 변경, 과적 허용 등, 끊을 수 있었던 고리들이 있었다. “우리는 늘 사고 이후만을 다루고, 원인을 묻지 않아요. 그러니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겁니다.”
반면, 자연재해는 ‘신의 영역’이라며 그는 냉정히 진단했다. 막을 수 없는 만큼, 대응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과학과 기술, 체계적 훈련, 그리고 리더십이 필요하다. “피해 최소화가 목표입니다. 더 어렵고, 더 많은 자원이 들어가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는 무너진 관행을 바로잡았고, 시스템을 바꿨다. “제대로 하면 됩니다. 저는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깃발이 필요합니다” 성장이 아닌 ‘행복과 품격’을 향한 국가 비전
박연수 전 청장은 지금의 한국이 경제적으로는 눈부신 성장을 이뤘지만, 국민의 삶은 그에 비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 국민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제시한 ‘잘살아보세’처럼 국민이 공감하고 따라갈 수 있는 깃발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지도자들이 경제 성장만 외칠 때가 아닙니다. 이제는 국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가치, 즉 ‘행복과 품격’을 중심에 둬야 합니다.”
무엇보다 비전은 명령이 아니라 공감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입으로만 국민통합을 외치면 공허합니다. 공감할 수 있는 목표가 있을 때만 국민은 힘을 내고, 함께 갑니다.”
그는 지금도 새로운 국가 비전을 설계 중이다. 방향은 분명하다. 국민의 마음이 모이고, 다음 세대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길. “정치는 말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저는 그 방향을 찾고 있습니다.”

“도시가 미래를 만든다” 강단 위에서 전할 메시지, 그리고 리더십의 본질
박연수 전 청장은 지난 한남대학교 AI기반 디지털혁신전략최고위(DIP) 초청 강연에서 ‘도시, 미래비전과 국가발전의 새 패러다임’을 주제로 원우들과 만났다. 그는 도시를 말할 때, 단지 공간이나 인프라를 의미하지 않는다. 도시란 기술과 사람, 산업과 문화가 융합되는 생명체이자, 미래를 가늠하는 거대한 실험장이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융합입니다. 그런데 그 융합은 연구소에서가 아니라 도시에서 일어납니다. 도시가 수요를 만들고, 실험을 가능하게 하고, 결과를 받아들이는 곳이니까요.”
그는 ‘도시의 경쟁력이 곧 국가의 경쟁력’이라고 단언했다. 특히 송도에서 보여준 것처럼, 잘 설계된 도시는 기술과 인재, 산업이 스스로 움직이는 자생적 생태계를 이룬다. “그 생태계를 만들기 위한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청사진이 아니라 리더십입니다.”
이번 강의에서 그는 단순한 도시론을 넘어서, 위기를 돌파하고 새로운 길을 여는 리더십의 본질을 강조했다.

“내 손녀가 살아갈 세상, 그게 제 정치입니다” 끝나지 않은 사명,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
인터뷰의 끝자락에서 박 청장은 여전히 바쁘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국민안전역량협회’를 만들어 재난에 대한 국민의 참여와 인식을 높이고 있고, ‘꿈나무 정치아카데미’를 통해 뜻있는 청년 정치인을 양성하고 있다.
“안전은 절반이 국가 책임이고, 절반은 국민 몫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적으로 국가에만 맡겨왔죠. 이제는 국민이 스스로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그가 설계하는 새로운 정치교육의 목표는 간단하다. 역량과 통찰을 갖춘 진짜 정치인을 키우는 것. “요란한 말보다는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 저는 그런 인물을 길러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조용히 말했다. “제 목표는 단 하나입니다. 내 손녀가 살아갈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고, 따뜻하고, 품격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제가 지금도 멈추지 않는 이유입니다.”
박연수 전 청장은 스스로를 ‘대한민국의 지도를 바꾼 남자’라 말한다. 하지만 기자는 그것보다 더 깊은 본질을 본다. 그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자, ‘리더십을 실천한 사람’이다.
도시를 설계한 이력이 그를 공무원에 그치게 하지 않았고, 재난을 다룬 경험이 그를 기술관료로만 남게 하지 않았다. 그는 늘 구조를 넘어서 시스템을 바꾸었고, 문제를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법을 만들었다.
이 시대는 위기를 넘어서는 리더십을 갈망하고 있다. 정치와 행정, 교육과 시민사회 모두가 방향을 잃은 듯 보이는 이 시점에, 박연수라는 이름은 다시 호출되어야 마땅하다. 단지 그의 과거 때문이 아니라, 지금도 그는 미래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그런 사람을 잊어선 안 된다.”
기자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되뇐다. 그리고 그 말이, 많은 이들의 공감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가희 시카고한국일보 한국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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