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의 달 특집-6.25 직전 어떤 일이 있었을까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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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Reddit>

1년만에 달라진 스탈린의 입장변화…이유는?

1949년 스탈린과 김일성의 만남 이후 국제환경은 발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설정했다. 이는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선을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으로 설정하고, 이 선 밖에 있는 지역에 대해서는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이 방위선 밖은 자위와 유엔에 의존해야 할 것”이라고 밝히며, 미국의 의무에는 한계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 방위선 밖의 한국, 대만의 안보는 국제연합의 책임 아래 둘 뿐 미국이 직접 개입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것이 북한이 남침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알고 있지만, 러시아에서 기밀해제된 6.25 관련 문서에서는 애치슨 라인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김일성은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 기간의 일정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이 때 스탈린이 남침계획에 자신감을 얻었던 부분은 애치슨 선언보다도 중국 공산당의 승리였다.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계획을 밝혔던 1949년 3월 이후, 1949년 10월 1일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리고 앞선 1949년 8월 29일 소련도 미국에 이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이 두가지가 한반도 공산화 전쟁에 스탈린이 이를 승인하게 된 계기라고 문서는 명시하고 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에 승리함으로써 당신들에게는 국제사회 환경이 개선되었소. 중국은 더 이상 내부 싸움으로 바쁘지 않고, 북한에 대한 지원에 관심과 에너지를 쏟을 수 있게 됐습니다. 필요한 경우 중국은 북한에 병력도 보낼 수 있게 됐소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제 중국이 소련과 동맹 조약을 맺었으므로 미국인들은 더욱 더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도전하는 것을 주저하게 될 것”이라며, “이러한 분위기는 소련이 이제 원자 폭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강화됐소이다”라고 덧붙였다.

스탈린은 그러면서 다른 여러 사항들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선 미국이 전쟁에 개입할 것인가와 이 전쟁은 중국이 승인해야만 시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스탈린 동지, 미국은 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미국은 소련과 중국이 배후에 있고, 우리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큰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전했다. 그는 또한 “마오쩌둥 동지는 항상 조국 해방을 위한 우리의 열망을 지지했으며, 중국 혁명이 완성되면 우리를 도울 것이며, 필요하다면 군대를 제공하겠다고 여러차례 말했습니다”라고 했다.

김일성은 이어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통일을 이루고자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스탈린은 우선 군대의 준비태세를 한 단계 높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정예화된 공격 사단을 구성하고 추가 부대를 만들어야 하며, 사단은 더 많은 무기와 더 많은 기계화된 전투 수단을 보유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세 단계로 구성된 계획을 제안했다. 첫째, 38도선에 가까운 지역에 병력을 집중 배치할 것, 둘째, 북한 지도부가 평화 통일을 위한 새로운 제안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6.25가 발발하기 며칠 전인 1950년 6월 7일 북한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은 ‘평화통일 호소문’을 발표하고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제안한 바 있었다.

스탈린은 “이러한 제안은 상대방이 거부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마지막으로 남한의 반격을 이끌어내야 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옹진반도에서 적과 교전하자는 의견에 동의하오. 누가 전투를 먼저 시작했는지 위장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신들이 공격하고 남한이 반격하면 전선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전쟁은 신속해야 하고, 남한과 미국인들이 정신을 차릴 시간이 없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소련 지도자 스탈린은 북한은 소련의 직접적인 전쟁 참여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소련은 유럽지역 관리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김일성에게 마오쩌둥과 상의할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하며, 중국 지도자가 동양 문제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김일성은 “남침 공격은 신속히 이루어질 것이며 전쟁은 사흘 안에 승리할 것입니다. 남한 내 게릴라 운동은 더 강해져서 대규모 봉기가 예상됩니다. 미국인들은 준비할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정신을 차릴 때쯤이면 모든 남한 인민들은 새 정부를 열렬히 지지하고 있을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이후 북한은 소련 군사고문단의 도움을 받아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결국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동족상잔의 비극은 시작됐고, 김일성의 예상대로 3일만에 서울은 함락됐지만, 남한내의 봉기는 없었다. 3일이면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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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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