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에서 19세기 탐험가와 마주 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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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뷰 더 그로브, 쉼과 사색의 공간
▶‘19세기 의학 이야기’6월 28일 전시 개막

일리노이주 글렌뷰의 ‘더 그로브(The Grove)’ 숲길, 통나무 벤치 위에 청동으로 된 한 인물이 조용히 앉아 있다. 한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멀리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이 인물은 19세기 북극 탐험가이자 자연사학자인 로버트 케니컷(Robert Kennicott)이다.
숲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치는 이 청동 탐험가는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다. 그 옆에 앉는 순간, 더 그로브가 품고 있는 시간의 깊이와 자연의 숨결이 조용히 다가온다.
이 조형물은 ‘더 그로브 헤리티지 협회(Grove Heritage Association, GHA)’가 창립 50주년을 맞아 2023년 가을에 기증한 것으로, 조각가 에릭 블롬(Erik Blome)이 실리콘 청동으로 제작했다. 약 1년에 걸쳐 완성된 동상은 숲의 분위기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마치 자연 속 한 장면처럼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이 동상은 일반 벤치처럼 만들어져 있어, 누구든 그의 옆에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방문객들은 조용한 숲길을 걷다가 그 옆에 잠시 앉아 쉬기도 하고, 사진을 남기기도 한다. 말 없는 청동 조각상이지만, 함께 마주 앉는 순간만큼은 묘한 존재감과 위로를 전해준다.


로버트 케니컷(사진)은 미국 자연사 연구의 선구자로, 러시아령 알래스카와 북극 지역을 탐험하며 수많은 생물 표본을 수집했다. 그는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1859년에는 시카고 자연사협회(Chicago Academy of Sciences)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며 시카고를 자연사 연구의 중심지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의 자연과학에 대한 열정은 바로 아버지인 존 케니컷 박사(Dr. John Kennicott)로부터 이어받았다. 존 케니컷은 1830년대 시카고 외곽에 더 그로브를 일종의 농장 겸 생태 연구소로 세우고, 식물학과 의학을 연구한 인물이다.
지금의 더 그로브는 그의 옛집과 부지를 기반으로 조성된 자연 보호 구역으로, 역사와 생태 교육의 공간으로 보존되고 있다.
1970년대 초, 개발 위기를 맞았던 이 땅은 지역 여성들로 구성된 ‘프로그 앤 펀 레이디스(Frog and Fern Ladies)’가 주도한 ‘그로브 살리기(Save the Grove)’ 운동으로 지켜졌다. 그 결과 1973년 국가사적지로 지정됐고, 1975년에는 GHA가 공식 출범해 오늘날까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문화 행사를 운영해오고 있다.
한편, 더 그로브에서는 올여름 새 전시인 ‘치유와 호기심: 19세기 의학 이야기(Cures and Curiosities)’를 개막한다. 이 전시는 19세기 당시 의학 도구와 자연 치료법, 정신 병원에서의 실태를 소개하며, 과학과 미신이 혼재했던 시기의 의료 현실을 보여준다. 특히 존 케니컷 박사를 비롯한 케니컷 일가의 의료 활동도 조명된다. 존 케니컷 박사는 의사이자 식물학자로, 이 지역의 자연 연구뿐 아니라 의학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전시는 6월 28일부터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진행되는 역사 투어 시간에 맞춰 관람할 수 있다.
또한 여름 기간 동안 케니컷 하우스(Kennicott House)와 더 그로브 내 유서 깊은 건물들을 소개하는 무료 도슨트 투어도 운영된다. 투어는 6월 19일부터 8월 3일까지 매주 목-일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진행된다. 현장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19세기 가족의 삶과 자연 연구의 현장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윤연주 기자>

더 그로브
주소: 1421 Milwaukee Ave, Glenview, IL 60025
웹사이트: glenviewparks.org/facilities/the-gr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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