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 긴급구호·투명한 성금 집행 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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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영 전 교수가 몬트레이팍 자택에서 LA 폭동 당시 한인사회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박상혁 기자]

4.29 역사기록 산증인 유의영 전 교수
당시 비상대책위원장 맡아, 본보와 성금모금·지원 앞장
커뮤니티 활동상 상세 기록

“4.29를 교훈으로 삼아 미국 내 소수계 민족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야 함께 공존 발전할 수 있습니다”

LA 폭동 30주년을 맞아 만난 미국내 한인사 연구의 산증인 유의영(85) 전 칼스테이트 LA 사회학 교수의 말이다. 한민족 디아스포라 연구의 대표적인 1세대 학자인 그는 LA 폭동의 참상과 교훈을 잊지 않고 후세에 전달하기 위해 한인사회 차원에서 체계적인 ‘1992년 4·29 LA 폭동 자료’의 기록자이기도 하다.

유의영 전 교수는 폭동 30주년을 맞으며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의 하나로 당시 한국일보가 주축이 돼 진행한 폭동 피해자 돕기 성금 모금의 성공적 진행과 투명한 집행을 들었다.

유 교수는 LA 폭동 직후인 1992년 5월1일 한국일보 미주본사가 발족한 코리아타운 비상구호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이었다. ‘폭도에 할퀸 내 동포 돕자- 생계 잃은 한인들에게 성금 보냅시다’라는 제목으로 한국일보가 주도하고 KTAN-TV, 라디오한국(라디오서울의 전신), 그리고 한미연합회(KAC)와 한인타운청소년회관(KYCC), 동양선교교회, 나성영락교회 등 한인사회 주요 단체와 교회 등의 주관으로 긴급구호 활동이 시작되자 유 교수가 최전선에서 진두지휘를 했다.

유 교수는 “미국 사회내 소수계 신문의 역할에 가장 충실한 신문이 미주 한국일보였고 한인사회가 위험에 처했을 때 빛이 났다”며 “당시 한국일보가 모금한 액수가 가장 많았다”고 밝혔다.그는 “고 임동선 목사의 주도로 동양선교교회 주차장에 한인구호비상대책센터를 설치해 구호품을 나눠주었고, 모금된 기금은 투명성 있는 관리를 통해 폭동 피해자들에게 500달러씩 지급됐다”고 강조했다. 추후 일부 다른 폭동 피해자 돕기 성금들이 기금 관리 문제로 논란이 됐던 것과는 대비되는 것이었다.

유 교수는 당시 비상구호대책위원장으로 구호활동을 체계적으로 지휘한 것 외에도, LA 폭동에 대한 철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한국일보 LA판 신문기사와 사진을 중심으로 1989년 11월부터 1993년 4월까지 주요 사건일지를 기록한 ‘1992년 4·29 LA 폭동 자료’를 정리했다.

칼스테이트 LA 명예교수이자 한미연합회(KAC) 센서스 정보센터 디렉터 시절 유 교수가 3년6개월에 걸친 폭동 전후 한·흑 간의 갈등과 이를 해소하기 위한 양 커뮤니티 노력을 4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꼼꼼히 기록해놓은 자료였다.

2000년 말 은퇴를 한 뒤 명예교수로서 계속해왔던 대학 강의도 그만둔 지 17년이 넘었다는 유 교수는 4.29에 대해 “흑인의 역사를 잘 알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화두를 던지며 “미국 사회에 여전히 실재하는 인종 간의 격차, 인종주의가 두루 작용했기 때문에 한인사회가 이를 잘 알고 교훈을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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